해외근무는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하며 생존을 배워가는 과정

런던외곽 남서쪽에 있는 뉴몰든(New Malden)역에서 하이스트리트를 따라서 분수대(The Fountain)로타리 쪽으로 가다가 보면 세이프웨이라는 슈퍼마켓이 있었다. 큰 식료품 판매장에 1980년대 당시의 한국에서는 쉽게 보기 힘들었던 노란 바나나가 큼지막하게 누워있고, 통으로만 사먹던 수박이 몇 등분으로 나뉘어서 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요즈음 분들은 그런 것을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국내에서 바나나 송이를 구경하는 것은 상류층에서나 가능할 정도였다. 서울 시내에서도 그런 수입 또는 고급과일만 전문으로 취급하며 판매하는 가게가 따로 있었으니까···.

그러니 슈퍼의 손수레(cart)위에 큰 바나나 송이가 놓여있으면 그것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재원 가족들이 식료품쇼핑을 가면 제일 먼저 바나나송이를 집어 드는 풍조가 있었다. 그 노란 바나나 한 손 실어 놓고는, ‘아 내가 이런 과일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흐뭇하고 넉넉해지곤 했다.

런던 도착 후 며칠 되지 않을 때 였다. 돌짜리 아이에게 필요한 분유와 영양식, 그리고 기저귀 등 필요한 물품을 사야 할 일이 있어서 집에서 한 1km도 안 되는 곳에 있는 그 슈퍼마켓으로 걸어갔다. 자동차를 사기도 전이라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직장선배의 호의어린 제의가 있었지만, 주말에 쉬는데 신세지기가 미안하기도 했고, 내심으로는 ‘그곳 카트에다 담아서 집에 가져다 놓고 다시 가져다놓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예의 그 바나나도 한 송이 사고, 분유 몇 통에다 생수까지 사니 누런 색 큰 봉투 3개에 카트가 가득 찰 정도였다. 그리고는 오후 6시경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 어두컴컴한 길을 나섰다. 그 슈퍼마켓 건물 옆을 돌아서 집 쪽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서는데, 직원이 길을 막아서면서 “이곳 이상은 카트를 끌고 갈수 없다”며 카트를 자기에게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컴컴한 곳에서 갑자기 길을 막아서는 것에 많이 놀랐다. 참으로 난감했지만, 별 수 없었다. 양팔에다 큰 봉지 세 개를 안고 걸으려니까,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몇 걸음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누런 봉투가 중간에 찢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봉지 하나를 내려놓고 우선 나머지 두 개의 봉지를 들고 오십 걸음 전진해서 내려두고, 다시 되돌아와서 봉지 한 개를 들어서 백 걸음 앞으로 가서 내려놓고, 또다시 오십 걸음 되돌아가서 지나쳐온 그 두 개의 봉지를 들어서 백 걸음 앞으로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영국은 위도가 높아서인지 겨울에는 오후 서너 시만 되도 어두컴컴해진다.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담소와 저녁식사를 즐길 시간의 그 인적도 없는 주택가 골목을, 개미가 분주히 자기 식량을 나르듯이, 혼자서 한참 동안 극기 훈련하듯 진땀을 뺀 다음에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로는 약 2~3분 만에 갈 수 있는 그 길을 식솔들 제대로 먹여 살리려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원맨쇼처럼 혼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가장(家長)의 숭고한 의무’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외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단기 연수와 출장을 나온 분들과 새로 본국에서 전입한 직장동료들을 위해서, 주말에 주재원가족들이 함께 런던근교로 피크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무언가 끓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집근처에 스포츠용품점이 있던데, 거기 가서 등산용 코펠(kocher)을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그 상점에 가서 "‘코펠이 있나요?’라고 물으니까, 주인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갑갑한 마음에 손짓과 함께 ‘fire up (불 위에) 보글보글’이라고 하니까, 금방 알아차리고는 코펠을 내 놓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등산용 취사도구인 코펠의 어원은 '독일 말 코허(kocher)인데, 요리하다는 뜻인 코헨(kochen)에서 나와서 일본말로 곳헤루(コッヘル)로 번역되었다가 우리말로 들어올 때 코펠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처음 개발한 독일인의 이름 코허(Kocher)를 우리식으로 표기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코펠’은 우리들만이 이해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그냥 ‘냄비 세트(pot set)이라거나 배낭용 취사세트(backpacker cookset)정도로 하면 알아들었겠지만, 그런 순발력으로라도 뜻을 이루었으니 되었다. 

나들이에서 점심을 나누다가 그 사연을 들은 모두를 웃음 짓게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영국 뉴몰든 주택가>

그 뉴몰든이라는 지역은, 우리 교민들이나 주재원들이 그리 많지 않던 그 시절에도 한국 사람들이 제법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 동네의 한 "정육점에 가면 소꼬리를 싸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아내가 그 가게를 찾아가서 “영어로 Oxtail please!(소 꼬리주세요!)라고 했더니, 영국인 주인이 한국말로 ‘오! 꼬리?’라고 대꾸해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인들이 제법 많이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영국인들은 잘 찾지 않는 부위였던 덕분에 싼 가격에 꼬리 찜을 수시로 즐길 수 있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 밖에도, 내가 극심한 몸살기운으로 끙끙 앓으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남편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할 줄 알았던 아내가 딸아이를 들쳐 업고 나가더니 느닷없이 홈닥터가 왕진가방까지 들고 집으로 달려오게 만들어서 놀라게 만들거나, 한국에서 중학교 영어 선생님 하다가 남편 따라 영국에 온 어느 회사 주재원 부인이 낯선 환경과 씨름하느라고 “아이들도 어린데 가정의(醫)지정도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다른 문화에 적응하고 생존해 나가는 지혜를 배워나갔다. 

영국의 가정의(醫)제도는, 거주 지역 내 진료소의 의사를 가정의로 사전에 지정 등록하여 1차 진료기관으로서 진료를 받게 하고, 그 가정의(home doctor, general practitioner)의 승인과 병원의 지정 의뢰 없이는, 응급 이외에는 2차 진료기관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골칫거리 중의 하나는 가족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 증상을 의사에게 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증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이국땅에서 남편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출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적인 용무로 출근이 늦어지는 것이 미안해서 이른 시간에 의사를 만나보고 가려니까 마음은 바쁜데, 우리말로 ‘온몸이 노곤하다, 팔다리가 어떻게 쑤신다’라는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조차 난감했다. 특히 말 못하는 어린 딸애의 증상을 설명하기란 그 당시 나로서는 참으로 난제였다. 

‘아이가 어떻게 보채며 무엇이 문제인 것 같다’는 아픈 증상들을 우리말처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통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지나는 중에 한번은, 한밤중에 딸애의 머리가 엄청나게 뜨거워지고 잠도 못 자고 보챘다. 그리곤 며칠씩 열이 떨어지지 않으니, ‘정말 이러다가 이국땅에서 자식 잃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사를 찾아가도 한국에서처럼 바로 주사를 놓아준다던가 하는 법은 없었다. 감기 몸살 처방이라야 ‘방안 환기를 시키라’거나 ‘비타민C가 많이 함유된 음료를 마시고 쉬게 하라’는 것이 기본적인 처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의 진찰을 받고도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서울서 가져간 어린이용 해열제도 소용이 없으니, 정말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고열로 고생한 지 며칠 째 되는 날 퇴근해서 보니,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저히 갑갑해서 견딜 수 없어서, 한국에서 소아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퇴근하고 집에 있던 그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내 절박한 마음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달되고 있음을 느꼈지만, 스스로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병원에 가도 열이 도대체 떨어지지 않는다. 갑갑해서 미치겠다. 어쩌면 좋으냐? 우리 애 좀 살려주게.”

“아마도 중이염일 것 같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네.” 

저 멀리서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 친구의 나직나직한 목소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비록 전화로 일망정 속 시원하게 우리의 전문의한테 정황과 병세를 이야기하고, 또 "크게 위험한 병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 속이 다 후련했다.  

그래서 바로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가서는, 가정의(家庭醫)의 소개서는 나중에 보완하기로 하고, 응급처치와 며칠간의 입원치료를 받고서 완쾌되었다. ‘신체의 적응과 면역력을 강조하는’ 그곳 가정의(醫) 말만 믿고 그대로 며칠 더 갔더라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만하기가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전화로 증상을 듣고도 바로 문제점을 짚어낸 그 친구를 내 마음 속으로는 명의(名醫)로 인정했다. 나중에 귀국해서 만났더니, 그 때 나로부터 "울먹이면서(?) 전화 왔더라고 다른 친구들에게 농담했다"던 기억이 난다.

아내도 종종 그때를 회상할 때면, 실소를 금치 못하곤 한다. 그 병원에서 의사가 ‘아이 귀를 만졌느냐?’고 물었을 때, 아내가 "귀이개로 귀지를 파냈다고 하고 싶은데 귀이개를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 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아서 ‘small spoon(작은 스푼)을 썼다’고 했더니, 의사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놀라면서, '아이들 귀에 쓰는 액체(ear syrup)가 있는데 왜 위험하게 그랬느냐'고 야단을 치더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귀지를 함부로 후비다가 그런 곤욕을 치렀지만, 덕분에 보고 배운 점도 많았다. 

나중에 아내가 전해주는 얘기로는, 아이가 입원했던 "킹스턴 병원(Kingston Hospital)에서는 거의 매시간 의사가 들어와서 살펴보고, 약 먹일 때는 약 먹여주는 간호원과 약 중량을 체크하는 간호원들이 같이 들어오고, 책 읽어 주는 사람, 놀아주는 사람, 목욕시켜주는 사람이 수시로 들어와서 보살피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완벽하게 돌보아주니까 보호자가 병원에 같이 있을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를 위해서 같이 있겠다고 하니까, 애기 엄마의 잠자리와 식사도 같이 제공해 주는 그들의 시스템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어린이 병동에 입원한 여러 어린이들 중에 보호자가 같이 체류하는 사람은 아내가 유일했던 모양인데, 보호자가 없어도 보호자 이상 세심한 배려를 무료로 해주는 그런 복지 시스템을 혼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체험한 셈이다. 

아이가 입원해 있음에도 직장 일에 매달려있는 남편을 탓하지 않고, 낯선 이국땅에서 자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해결하는 어머니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렇듯 해외근무를 나온 주재원과 가족들이 그 나라의 문화와 생존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그저 재미있었던 일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그 일들을 겪을 때에는 정말 생경하고 진땀나는 순간들이었다고 하겠다.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이렇듯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게 되는 모양이다. 
 

<런던 동남부 Kent주 Highland 지역의 겨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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