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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나에게 넌 해질녘 노을 같았어, 곧 저버릴 게 뻔했지
  • 지해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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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얼마 전 지인과 오랜만에 맥주 한잔을 하게 됐었다. 그 자리엔 지인의 아는 형이라는 사람도 함께였다. 통성명과 함께 적당한 소개를 나눈 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그 형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가 중간에 먼저 간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고, 다음에 내 지인이 ‘형이랑 또 같이 볼래?’라 묻더라도- 그것 역시 별 상관이 없었다. 처음 한 시간은, 그랬었다.

그런데 자리가 무르익자, 나는 그 형의 성격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서른 한 살인 나보다 대 여섯 살 쯤 많았었는데, 그는 ‘어른 중에 어른’이었던 거다. 최근 내가 만나오던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부류였다.

익숙한 듯 낯선- 대화 상대였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사회초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지금 30대 초반의 친구들을 보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업무를 처음 시작하는 데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요즘 ‘젊은 친구들’로 구렁이 담 넘듯 부드럽게 대상을 바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형적인 진짜 어른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Disney

그는 열심히 살아온 사회인 같았다. 착실히 자기 삶을 걸어온, 여전히 성실한 사람. 어느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바른 젊은이. 사실 내 주변에는 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사는 어린 친구들이 많다. 다만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만이 전부인 것만 같은 사람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제목에 썼듯, 그는 해질녘의 노을 같았다. 혹은 새벽녘의 태양 같기도 했다. 애틋함이나 이런 감정을 섞지 마시라. 그저 그게 전부다. 어느 방식으로든 나아길 방향이 뻔해보였기에 이런 표현을 쓴 거다. 그래서 난 그가 더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일까? 아니, 자신이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자신의 철학을 깨부술만한 사건이, 있었을까.

나는 누구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철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건 맞지만, 누구나 그 길을 따라야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길 위에서 진짜 인생을 배우며 자기 철학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또 그러기 위해 일부러 비극적 사건을 겪을 필요도 없다. 통찰력이 있다면, 겉보기에 아주 사소한 사건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영화<유스>중에서
영화<유스>중에서

오랜만에 니체의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삶을 ‘낙타-사자-어린이’ 총 세 단계에 거쳐 비유했다. 물론, 모두가 마지막 단계인 ‘어린이’까지 닿는 것은 아니다.

낙타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짐을 진 모습이다. 책임과 의무, 견뎌야 할 고통의 무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짐을 진다. 낙타에겐 주인이 있다. 현대에서는 그것이 자본일수도 있다. 자유롭지 못한 속박된 모습이다.

동물의 왕 사자에겐 주인이 없다.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사자의 단계 역시 완벽한 자유는 아니다. 사자의 자유란,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닌 속박에서 풀려난 모습이기에 그러하다. 즉 어느 세계나 사회에서 한 개인의 자유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만을 생각할 때가 많다. 지금 내가 낙타라면, 사자가 되길 바란다. 청동기 시대에 이미 인류에겐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DNA에는 계급적 본능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인간은, 돈을 벌어서 자신의 계급을 상승시키길 원한다. 낙타와 같이 짐진 자들 우위에 서고 싶어 한다. 사자와 같이 자유로워지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을지 모른다.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은 돈을 주고 남들을 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사자의 상태, 그대로 자유롭고 행복할까? 우리는 사자가 사자이기 위하여 견뎌야하는 고통을 생각하지 못한다. 사자는 거저 동물들의 왕이 된 게 아니다. 조기 사망률이 높은 사자는,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많은 훈련을 거친다. 완벽히 어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하다. 그렇다면 과연, 니체가 말하는 어린이의 단계는 무엇일까?

어린이의 일을 생각해보자.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 우리 모두 각자에겐 할 일이 있다. 어린이의 일은? 노는 것이다. 완벽하게 노는 것! 그게 어린이의 일이다. 어린이들은 놀이에 완벽히 몰입한다. 그것을 통하여 세상사는 방법을 익힌다. 때로 어린아이들은 부모나 다른 형제, 친구의 감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상태라는 거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겠지만(그럼 오히려 현실적 자유가 억압되는 낙타의 상태가 될 지도!)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세 가지의 단계로 알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책임을 다한 자유로운 상태일 때 우리는 몰입하기 쉬워진다는 것. 누군가들은 정말 빠르게 그것들을 거쳐 어린아이의 상태에 이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Disney

나이와 관계없다. 지구의 나이가 몇 살인가? 우리 사회의 규범과 문화는 언제부터 존재했나? 이 세계는 완벽한가? 아니, 누구도 이것이 정답이다, 옳다, 너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친구 사귀지 마라, 그런 남자 혹은 여자는 만나지마라-라고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감히 난, 조금은 어린이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다. 사자처럼 현실적으로 높은 계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자유를 영위하고는 있다. 난 내면의 욕구에 충실히 귀 기울이려 한다. 이런 나는 어린이와 같이 친구를 사귄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 가면, 친구의 외모 말고는 평가할 게 없었다. 외모는 본능적인 거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누군가들의 직업이나 지갑 사정, 나이, 이런 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상대방 역시도 어린이의 상태여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책임과 의무만을 말하는 ‘철들고 성실한 어른’에 대한 나의 부정적? 혹은 거리두기의 감정은, 아직 미성숙한 어린 애의 투정일 수도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책에서 주워, 핑계대기 하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도 과거에 잠깐 그런 시간을 겪었던 어린 애라, 감히 이런 말들을 적어낼 베짱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Disney

해질녘의 노을 같던 그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었으니까. 다만 언젠가 어린이의 상태가 될지도 모를, 뭇 낙타와 사자들이 훗날 이 글을 읽고 기분 좋은 공감을 해주었으면 한다. 그땐 나에게 이메일이라도 한 통 보내어주길, 우리 같이 놀래?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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