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에겐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공감신문 신도연칼럼]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누군가의 행동을 본다는 것.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린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자그마한 부담을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얼굴. 부모님. 그때부터 우린 사람을 만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로 인해 우린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회안에서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출처: 대중의 심리학>

요즘 우리에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나로그가 아닌 딱딱한 디지털화 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페이스 북 심지어 서로간의 대화를 차단하는 문자 메시지.
편해서 좋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본지가 언제 인지, 얼굴을 보며 각자의 삶을 얘기 해본지가 언제인지 이쯤해서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갖는 커뮤니케이션 이라는 소통의 미명아래 얼마나 그 기초적인 인간의 만남을 유지하며 살아왔는가.
언제부터 사람들이 기계가 주는 편리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야기 하며 살아 왔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표현이 서툴다.

그 서툰 표현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기계적 디지털에서는 너무도 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성과 마음 그리고 사람의 정이 없다는 것이다.

때론 전화 너머 들리는 사람의 말이 어찌나 반가운 사람의 말인지...그 만큼 우린 말과도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음에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 이 글을 쓰면 새삼 느껴보는 것들이다.

누구가의 얼굴을 보면서 말하는 것과 그 말을 문자로 만들어 보내는 것에는 참 많은 왜곡이 존재한다.
왜곡과 곡해, 오해  그리고 과대 포장의 것들 이것들은 자신에게 비춰지는 이미지의 부족한 편린(片鱗)들이다.

사람을 만나 눈을 보고 그 마음을 직접 느끼며 하는 말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우리는 사람들의 따뜻함 보다 냉소적인 태도를 느끼게 된다.
아마 벌써 우린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정한다. 예전에는 전화기로 목소리를 듣고 약속 장소를 정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종각역 종로서점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추운 겨울엔 군고구마를 파는 리어커 옆에서 장작불에 시린 손을 녹이곤 했다. 그리고 반가운 친구 얼굴을 보며 피막골에서 막걸리에 고갈비를 뜯으며 인생을 논하곤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문자 메시지로 약속을 정하고 정해진 약속 장소 역시 문자로 주고 받고 만나서 하는 말은 그다지 많지도 않다. 다들 스마트폰에 고개를 숙여 또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말을 주고 받는 모습들.

사람이 만남을 갖는 것은 만남과 동시에 인연의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 그와의 인연을 가지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또 다른 인연을 엮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게 바로 인간의 만남이 주는 중요한 인연의 끈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선샤인' 중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일반적인 소통과 의식대 의식의 만남 등 다양한 방법의 만남이 일종의 사람들간의 교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다름을 주고 받는 것, 느낌의 다름을 주고 받는 것 등 다양한 만남의 교감이라는 것이 바로 인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각자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존재는 다른 누군가와 다른 의미가 있고 고유한 주체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임을 자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소중한 느낌이자 소통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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