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름답기 위해 우리는 교육을 받는다.

[공감신문 신도연칼럼] 사회라는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해 노동이라는 것을 도구로 삶을 영위해 왔다.
최초에는 어떠한 직업을 갖느냐의 문제보다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느냐의 문제가 컸을 것이다. 차츰 사회가 진화하고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어떤 직업 갖느냐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정형화되고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대량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산업 편재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시스템에 맞춰 인간이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고용주가 생기고 그 고용주가 고용하는 피고용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진출처: 연세어학당>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대량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기 시작하면서 교육이라는 체계가 전문 인력 양성이라는 말로 근대 교육을 잠식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근대교육의 체계는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발전 되면서 소위 지금의 취업 대란이라는 말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소비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custormer insight다. 이러한 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의 필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기 시작했다.

요즘 시대는 기존 근대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시스템 적응력 보다는 개개인의 개성과 생각 그리고 그 특성을 이어나갈 수 있는 특성화된 교육의 기회를 늘 요구하고 있지만 교육은 이미 거대해진 메머드가 되어 버렸다. 

이미 커버린 교육의 인프라는 기존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적 수준이 아닌 이젠 먹이를 요구하는 즉 ‘교육은 바로 돈이다’ 라는 공식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시스템에 정비를 필요로 하는 목소리가 늘상 나오고 있지만 이미 교육은 그 나라의 사적 머니 인프라로 변하고 말았다. 즉 변화하가 쉽지 않은 타성의 돈 벌이로 전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교육부가 엄연히 존재한다. 교육의 바르고 옳은 것으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 백년지대계를 책임지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 있는 공무원들의 모습이 어떠한가?

가진자들을 대변하는 교육 정책으로 기득권의 목소리만 듣는 교육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나라의 비전보다는 자리를 지키 위한 배부른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미 이러한 국가적 교육 사태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온 부패의 산물이다. 일제 잔재의 전형이 아직도 남아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적 환부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는 것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바꿔야 함을 인지 하면서도 절대적인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국가 공무원의 모습에 다시한번 돌을 던지고 싶어진다.

<사진출처: 교육부>

소위 명문대학을 다니면서 하고자 하던 상아탑의 위용을 알리고 싶었던 그 마음은 간데 없고 국가고시와 토익에 매달려 스스로의 생각과 꿈을 망각한채 너도 나도 삼성만을 바로 보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 암담하다 못해 불쌍하게 여겨진다.

사회에 나가 사회인으로써의 역량을 키워 나가야할 시점에 아무리 봐도 상관없는 지식을 넣느라 책과 씨름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제 잿빛이 되어버린 상아탑 아래에서 허기진 지식의 배를 부여 잡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만고의 진리라 듣고 살아온 말 “위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지만 이미 자정기능을 상실한 탁한 윗물의 대한민국이 어찌 아랫물이 맑기를 바라는지.

그들의 눈에 절대적으로 아랫물이 맑아 보일 수 없다.

대학의 덫에 걸려 10대를 흘려 보내고 직장의 덫에 걸려 20대를 보내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모습을 이젠 좀더 깊이 있는 혜안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직업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들의 니드를 충족시켜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다시금 르네상스로 돌아가자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 말은 고전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교육의 르네상스가 필요한 시점임을 다시금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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