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나는 친구들에게 인생에 너무 높은 기대치를 세우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가, 한참을 피곤한 토론에 끼어야만 했다. 모든 일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길래, 지금도 괜찮지 않아? 라고 물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친구는 나에게 ‘그럼 꿈도 꾸고 살지 말라는 거야?’라고 대뜸 버럭했다. 나는 꿈을 꾸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건 꿈과 매우 다른 것이다.

그 친구가 가졌다는 인생의 높은 기대치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질적인 부분이었다. 음식이나 안락함, 문화적인 것, 그리고 사교생활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구는 ‘난 당연히 이 정도를 누려야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기준점은 친구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영화<그때 그들>중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상대방도 더 잘 인정해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좋다. 예전에 중국의 공자 선생께서는 평소 장신구를 즐겨 착용하셨다 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면 좋은 기운이 따라온다고 생각하셨다. 이것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신구를 하면 운세가 좋아진다?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 이야길 지 모른다. 실은 자신이 귀하고 좋은 품행을 해서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사실 자존감을 관리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나’만 멋있어야하는 게 아니다. 보여주지 않는 ‘나’에게도 잘 대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집에 머무르며 작업을 해야 될 때, 오히려 좀 예쁜 옷을 입으려고 한다. 기분에 따라 두 세 번 갈아입을 때도 있다. 내가 원하는 바이브(vibe)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걸 기氣라는 단어로 대체 가능하다. 기를 중시했던 공자처럼, 나 역시 나만의 방법으로 옷을 꾸며 입거나 혹은 원하는 향초로 긴장을 완화하기도 한다. 조명을 바꾸는 것도 몹시 효과적이다.

새벽의 격세유전(Atavism at twilight)(강박 현상)>, 살바도르 달리 / 베른 시립 미술관 소장

나는 삶에 있어 그렇게 기대치가 높은 편이 아니다. 지금을 잘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지금 내가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것 중 누리거나 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 친구들의 삶이 나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기대치가 높으면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행복도는 내가 좀 더 높을 것 같다.

일상에 감사하며 산다는 게 사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기대치를 낮추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요즘 나는 방송을 만들고 있다. 녹화가 있는 날은 거의 끝나고 나서 마무리 ‘한 잔’을 한다. 스튜디오에서 게스트와 두 시간 정도 떠들고, 맛있는 거에 술! 사실 가끔 내가 이런 걸 해도 되나? 싶을 때가 많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랬는데- 과연 내가 오늘 수다를 떤 게 ‘노동’이 맞는 건가? 내가 오늘 밥값을 제대로 한 건가, 싶어서다.

인간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꾸 말도 안 되게 ‘놀고먹는’ 혹은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런 걸 안 해봤지만 장담하건데 돈 많은 백수는 바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런 아저씨를 본 적이 있는데 어릴 적 친구들은 아무도 그와 놀아주지 않고, 성격이 매우 포악하면서도 쓸쓸해보였다.

20대의 돈 많은 백수는 행복해보일 수 있지만 50대의 돈 많은 백수는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나의 욕망 수수께끼>, 살바도르 달리 / 뮌헨 주립 현대갤러리 소장

사랑이랑 똑같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상대에게 기대하게 된다. 사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저 사람은 어떨까?에서 시작되어....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 사람과의 시간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변화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서로는 점점 현실을 파악하게 된다. 기대가 기대였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 늘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연애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일부러라도 좀 줄이고 시작하면, 상대방의 행동에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잠들기 전에, 오늘 그런 사랑을 받게 해줘서 감사한 하루였다는 명상을 할 수 있는 삶이 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중에서

기대치가 높은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당연히 무엇을 이만큼은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린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어렸기에 보호받았고, 부모의 자식이기에 무조건적으로 받았던 사랑이 만연한 사회에 있지 않다. 어른이 되었으면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도, 우정도, 더 나아가 부모 자식 간에도 세상의 모든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다.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살려면? 그만큼 성실하면 된다. 혹은 그걸 다르게 쓸 수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현실과 기대 사이의 괴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에단 호크가 인생의 멘토로 생각한다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는, 재능 가진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이가 너무 큰 거죠. 예술적으로 엄청난 걸 이루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너무나 서툴러요. 그걸 견디지 못하니 신경과민이 되는 거예요. 균형을 못 찾는 거죠.”

세이모어와 에단호크

오히려 이러한 괴리를 잘 이용하면?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많은 아름다운 뮤즈들이 자기 손으로 공과금을 낼 줄 모르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러한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분명히 보이는 남자이므로.

사실 내가 하고 싶던 진짜 이야기는 이거였다. 인생의 기대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을 살며 느낀 부분과 감정, 자신에 대한 깨달음,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그냥 알고 지나가면 안 된다.

스스로 불만이 많다고 느낀다면 그게 왜 그런 건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로 인해 내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왜? 그것은 누가 주변에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해야 한다. 또 자기 스스로와 가장 오래 함께 있는 사람 역시 나 자신이니, 지속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멜랑꼴리’한 담즙을 타고났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자살을 한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심지어 꽤 오래 살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관찰이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이 기도하는 것과 같다. 신경이 쇠약해지다? 그럴 때도 있지만 예민하고 섬세해진 신경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를 돌보고 기록하는 날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어떤 방식으로든 상관없다. 이미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내 마음은 새로 사귄 여자친구처럼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