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신도연칼럼] 문학과 정치를 논하려고 하면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 같다.
하지만 문학의 정의에서 정치가 읽혀지고 정치의 이데올로기에서 문학이 보이는 이유는 어떤 이유에서 일까?

문학은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고 풍자하고 이야기하는 존재이지만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는 문제점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그 두 장르가 공존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고로 양날의 검을 가지고 문학이 사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반영하든지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문학에는 정치적으로 가공할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이변의 법률사무소>

오래전에 우리는 소설 ‘도가니’의 열풍을 보았다. 필자 역시 그 도가니를 읽으며 울기도 하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혼자서 술을 마신적이 있다. 도가니 소설이 정치적, 사회적 사건으로 공론화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문학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문학이 정치적 색깔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것인데 과연 문학이 이러한 색채를 띠고 있어도 되는가 마는가 하는 소모적 논쟁의 여지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문학이 가지는 사회적 파급력은 실로 어마어마 하다. 모 매체에서 문화계 인물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 인물로 이외수 작가가 1위를 차지했다. 김지하, 공지영, 이문열, 황석영 등 다양한 문인들의 이름을 그 순위에서 볼 수 있었다. 작가들은 스스로의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발언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적 의견으로 공론화 되고 사회적 파급력 가진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들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시인 김지하 씨가 ‘한국작가회의’로부터 재명의 논란으로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김 작가는 유신시대 대표적 저항 시인으로 불렸지만 그 때와 전혀 다른 행보로 바뀌면서 화제를 모았다. 황석영 작가 역시 군사독재에 싸우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외치던 분이 소위 중도실용주의를 주창하며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을 동행해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경우도 있었다. 이외수 작가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트위터를 통해 많은 팔로우를 보여주고 있어 트위터의 남자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다.

작가 한영동이 쓴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우리들의 자세’라는 책을 보면 “우월 의식에 입각한 비아냥과 조롱만으로는 그 무엇도 바꿀수 없습니다. 선과 악과을 구분하고 상대방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진영 논리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한 작가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좌우 진영의 시대를 아우르고 하나되는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뜻이다.

더불어 올바른 민주주의는 작가의 자유와 정치 참여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사진출처: 이변의 법률사무소>

그렇다고 모든 작가들이 다 옳은 글을 쓰느 것은 아니다. 특히 문인들의 정치 참여가 득인가 실인가에 대해서는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것도 안다. 정치는 권력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 권력을 갖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김지하, 황석영 작가 처럼 전향을 가지고 “악한일이야”라고 규정 짓는 것 역시 표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대한민국에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다. 요즘 들어 더더욱 그 표현의 자유에 대한 말을 많이 듣는다. 어찌 보면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가 보장 되지 않아서 그 자유가 그립다는 말일 수 있다.

작가 역시 주어진 표현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가 갖는 방법으로 그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좋은 세상이라면 각기 다른 문제 의식과 사상에 대해 포용력을 가지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된 대한민국 작금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은 타인의 배려에서 오는 따뜻한 민주주의 역시 고갈 된 듯 하다.

나에게 소중한 것 역시 남에게도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 보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한 새로운 배려를 배워가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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