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쓸쓸함은 인간이 갖는 고통 중 최고의 아픔일 것이라 생각한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아픔을 알 수 있는 표면적 고통이기에 스스로 병원 찾아 해결하고 약을 먹고 고통을 줄인다. 하지만 인간이 갖는 외로움과 고독, 쓸쓸함에는 약이 없다. 병원도 없고 병명도 없다. 이것이 말하는 고통이란 늘 갖춰진 틀에서 갖는 고통보다 훨씬 큰 아픔이라는 것이다.

사진출처=어려운 인문학 바로 알기

우리가 말하는 문학 역시 고통의 문학이 존재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문학이 바로 그 고통의 문학이 아닐까? 주어진 답도 없이 무턱대고 읽고 생각하고 혼자 고민해야 하는 쓸쓸한 문학.

어떠한 해답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각자의 답인양 인문학은 개인적 답을 내놓는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모호성을 가지고...

통찰의 영역이라 했던가? 인문학은 절대적으로 통찰 되지 않으면 절대적 답을 말할 수 없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통찰력이 무엇인가... 늘 고민하던 고민에 또 다른 고민을 던져본다.

인문학이 무엇일까? 이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으로 가장 기초적인 바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철학, 언어, 문학 등 인문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인문학의 정확한 정의와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인간의 삶에 가장 깊숙이 내재된 것으로 어떤 것으로도 그 학문의 정의를 내리기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유는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숨을 쉰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인문학도 그냥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아무튼 인문학은 커다란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세상 만사가 아닐까.

그래서 자꾸 정체되어 있는 듯한 학문으로 치부되고 어렵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작은 틈이라도 있었다면 인문학이 지금의 이 어려운 학문으로 불려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인류가 발전하면서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겨 인문학이라는 말을 하고 다른 학문과의 비교를 통해 그 정의를 찾아가는 듯 하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내용을 수치화해서 데이터로 만들어 풀어 놓은 것이 과학이라고 하고 모든 것을 생각이나 사고 등 다양한 범주에서 현재에 대한 예측이나 치열한 사고의 마찰로 이루진 것이 인문학이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인문학은 시대적 상황에 맞게 바뀌는 유동적인 학문이다.

사진출처=어려운 인문학 바로 알기

■젊은이의 인문학

청춘 스스로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맞춰진 틀에서 스스로의 발전을 이야기 한다. 사회적 문제라든가 이데올로기적인 반응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헤게모니가 아직은 낯설은 청춘들.

많은 청춘들이 스스로를 합리화 하기 위해 방향을 정당화하고 방황의 시작을 하는 듯 하다.

문제는 스스로의 방황이 방황을 끝나 버리는 애석한 경우가 많다. 방황을 했으며 그 방황에 대한 경험이나 실력이나 생각이나 사고의 깊이가 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데 발전성이 결여됨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도록 방황의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방황은 고스란히 세월의 추억으로 사라진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청춘의 인문학은 방황으로 시작된 학문으로 그 방황이 갖는 세월이 고작 몇 푼의 돈에 의해 교환된 것으로 포장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한국의 잘못된 인문학

사회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있는 대중들이 도저히 이대로 살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한국은 현재 엄청난 실업률에 자살 그리고 저출산이 가져오는 미래 한국의 어두운 예상들. 한국이 학문을 수입해 배워온지도 오래전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적으로 외국에 종속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데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국의 사상이 한국의 지식인에 의해 장악되어 본적이 없다는 서글픈 현실. 이 말은 한국의 지적은 늘 외국의 지식에서 비롯되었고 그 외국의 지식을 빌어 한국 경제를 이끌어 왔다는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떠한 합리적인 부분도 없이 이루어진 정치적 잣대로 재어 본 한국의 개발 현실. 기본적 일관성과 담쌓은 사람들이 애초에 합리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는데 한국은 자꾸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인문학을 논한다.

국내의 지식들은 권위만 찾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권력형 인문학만을 강요 한다. 우리는 그런것을 학문이라고 배우고 있다.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조선민중을 수탈하고 싶어하는 점령군들은 대중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인문학 같은거 해봐야 취직도 못하니 그냥 기술 배워서 전문가가 되어라 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전문가란 평생 하던 일만 하면서 내 밑에 있어라 라는 말과 같다.

인문학이 바로 서야 대학이 바로 선다. 철학과 자기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심을 두는 사회에서 그런 사회에서 대접받고 살아가는 가는 사회의 모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꾸기 위해 오늘도 인문학의 책을 펼쳐 스스로 지식인 되기 위해 노력 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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