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몇 년 전부터 전세계 시민들의 과제로 제시된 ‘지속 가능한 개발’이, 이젠 국내에서도 산업분야에 확대되어 지고 있는 듯하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 팀이 제시한 ‘2019 트렌드 코리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젠 ‘필必환경’시대다. 여기에 발맞춰, 환경문제에 적극적이지 않던 제조 위주의 산업분야 역시도 지속 가능성을 인식한 듯한 광고와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작년 즈음이었다. 지구 문제에 대한 글을 쓰다가 우연히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 :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가 본 여러 캠페인들이 이 목표 사업의 일환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필자의 artwork = 인스타그램 @haesoolikegoodies

그런데 지속 가능성이란 단순히 환경에 관한 이슈만이 아니다. 사업 분야에선 기업을 잘 운영하는 것, 깨끗하고 정당한 회사의 경영 역시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대두되는 것이다. 경영이 투명해야 기업의 기속 가능성이 커진다. 이처럼 우리 삶 곳곳에 여러 분야에 적용시켜 생각할 수 있다.

이 테마를 꽤 오랜 시간 계속 인식하고 있다 보니, 재화- 이를 테면 패션이나 도서, 그리고 문화적인 이벤트에 있어서도 지속 가능한 것-들 위주로 경험하거나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아예 관심 밖이 되었고, 또 반대의 것들은 정말 단순히 갖는다-를 넘어 ‘진짜 내 것이구나-’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혼자 산책을 하다가 궁금해졌다. 나는 지속 가능한, 인간일까?

일단 인간은 맞다. 가능한 인간? 무엇이? 지속이. ‘지속 가능한 개발’은 UN에서 발표한 영문을 번역한 것이니, 원문에 쓰였던 ‘sustainable’을 가지고 생각해봐야겠다. ‘-이 가능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able’을 빼면 ‘sustain’이라는 동사가 된다. 살아가게 하다, 지속하게 하다-라는 타동사다. 살게 하는 것, 뒷받침 하는 것이다.

그냥 유지하거나 내가 지속하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한글로 생각했을 때는 이 정도 느낌이 아니었는데 영어 그대로 풀어보니 뭔가 되게 무거운 느낌이 드는 단어다. 그렇다면 나는 지속 가능한 인간일까? 때론 그렇다. 어떨 때에 그러한가? 이웃을 도울 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작은 부분이라 딱히 ‘살린다’고 할 수 없다. 내가 sustainable할 때는, 바로 사랑을 할 때였다...!

사랑에 빠진다는 어쩔 수 없이 ‘화학작용’이다. 나는 수많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하여 상대방에 대한 수많은 상상을 한다. 이것은 아마 나의 뇌를 가장 창의적으로 만드는 활동일 것이다. 무의식에 남아있던 어디서 본 영화의 장면이랄까, 외국에 좋은 레스토랑을 많이 가본 부자 친구가 해준 이야기의 데이트, 생전 처음 남자 향수의 향기를 맡아봤을 어느 인상적인 순간... 뭐 그런 게 다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다.

필자의 artwork = 인스타그램 @haesoolikegoodies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맘마’라는 단어를 가르쳤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가르치지 않은 단어를 툭- 내뱉을 때가 있다. 언젠가부터 아기는 그 단어를 들어왔던 것이다. 아기 보던 사람이 전화를 자주 받아, ‘여보세요’하면 아기가 어느새 여보여보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걸 들은 어른들은 화들짝 놀랄 것이다. 사랑은 그런 놀랄만하고 인상적인 이벤트 투성이다. 물론 좋은 이벤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이라는 아기는 함께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둘 다 그 아기가 어떤 방식으로 커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사랑의 묘미인 걸, 해본 사람들은 안다. 여기저기서- 특히 요즘 같이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는 남의 연애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그럼 ‘이런 사람을 만나면 이럴 것이다’라는 나름의 생각- 혹은 선입견이 생긴다. 이를 토대로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연애하게 되면...

거의 예상은 빗나가죠!
‘이런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또 ‘이 사람이 너무 좋은데 과연 잘 만날 수 있을까?’라고 염려 가득 시작했다가 잘 만나는 경우도 있다. 예측이 불허하다.

부모가 아기를 양육하는 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방법과 힘을 기르게 하려 함이다. 음식을 씹고 소화하고, 배변하고, 잠을 자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등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혼자서도 자생하게 하려고. 사랑이라는 아기가 다 자라면? 부모의 품을 떠난다. 세상의 이치다. 사랑이, 두 사람을 떠나갈 것이다. 슬프지만 진짜다. 생물학적으로 그러하다(남녀간의 사랑은 생물학적으로 약 2년간 지속된다고 하더라). 어느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두 사람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그것도 남녀의 사랑 못지않게 매우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다.

사랑할 때의 나는, 나와 만나는 그 사람이- 그리고 그 사람과 만나는 내가 좀 더 행복하길 원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좋은 습관이나- 하다못해 예쁜 추억 단 한 가지라도 어떤 무엇을 가지고 가길 원한다. 그게 뭐가 될지 서로가 전혀 예측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수많은 방식으로 노력하며 해보지 않은 것들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의 만남은 처음이므로.

이럴 때에 나는 숱하게 고민하고 머리를 쓰고 또 소중히 그것을 다루려 한다. 내가 지속을 가능케 하는- 누군가를 ‘더 잘’살게 만들려는-, 또는 ‘무지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필자의 artwork = 인스타그램 @haesoolikegoodies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해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인간- 그리고 결론이 여기에 닿자, 조금 슬프면서도 허무하고- 또 다행이구나 싶었다. 최소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아직 남아있어서. 아, 나는 지속 가능한 인간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구나!

아마 지속 가능성이 발휘되는 순간들은 사람마다 전부 다 다를 거라 생각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살게 한다는 것, 그건 진짜 멋진 일이다. 어떤 이들은 노래를 불러서,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자기 인생 자체를 증명하며 남을 살게 한다. 아마 그 때를 빠져나와 돌이켜 본다면- 그 순간은 매우 인상 깊은 경험일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살게 만드는 행위이며, 우린 또 그러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살아간다.

UN에서 제시한 ‘지속 가능한 개발’은 총 15년간의 목표다.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나는 ‘지속 가능한 인간’이길 원할 것이며, 그런 인간이란 무엇인지 고민한 ‘오늘의 나’를 계속 기특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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