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화두는 ‘리더(Leader)란 무엇인가’였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사태와 예정된 일정 보다 조기에 실시된 대통령선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리더는 모든 조직에 존재한다. 국가와 기업에도 존재하고, 정당에도 존재한다. 학교와 계(契)모임, 동호회에도 존재한다.

리더의 행동은 조직의 생존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리더가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결정을 내리면 그 조직이 무너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 또 조직 구성원들이 매우 힘들어진다.

올바른 리더와 올바르지 못한 리더의 차이는 특히 전쟁터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과연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

 

■ 명장이라 불린 그들

▣ 홍의장군 곽재우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장군은 이순신과 권율만이 아니었다. 홍의장군 곽재우도 존재한다. 곽재우는 조선 중기 무신이자 의병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다.

이름보다 홍의장군으로 불리는 더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진 곽재우. 그는 뒤에서 지휘만 하던 조선시대의 장수들과 달랐다.

곽재우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곽재우는 불리했던 전황과 부족한 물자에도 불구하고, 승전보를 알린다. 당시 곽재우는 약 2000여명의 의병을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장군,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마다 늘 앞에서 의병들을 이끌었다. 당시 의병들은 앞장서는 그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떨쳐냈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군들은 붉은 색 옷을 입고 선두에 나타난 곽재우와 그와 함께한 의병들인 홍의군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홍의장군이 두려움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전투 때마다 늘 앞장섰던 곽재우가 눈에 띄는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곽재우 유물 일괄은 곽재우 장군이 사용했던 장검과 마구, 포도연(포도무늬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 6점의 유물이다. 보물 제 671호. 경상남도 의령군 충익사 소장. /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물론, 우리나라 최초 의병이라는 점과 뛰어난 전술이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전투에서 늘 앞장섰던 모습이 곽재우를 지금까지 기억되고, 회자되게 만든 것 아닐까?

▣ 체스터 니미츠와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을 미국이 공격해 승리한 전투다. 미드웨이 섬은 당시 매우 중요한 태평양의 전략 요충지였다. 미국은 이 전투로 일본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왔으며,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 특히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지휘관은 체스터 니미츠였다.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 항공모함’도 존재한다. 미드웨이 해전은 전투함의 포격전 없이 항공모함 함재기로 치러진 전투다. 니미츠 장군은 오직 항공기만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항공모함은 4척이나 격침당한다. 항공모함이 매우 귀했던 당시 상황에 비춰 볼 때 이는 매우 큰 피해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 출처=위키피디아

미드웨히 해전 발발 전인 1942년 4월, 하와이 주둔 미국 해군 정보부의 암호 해독반은 일본군의 무전이 증가하는 것을 발견한다. 또 ‘AF’라는 문자가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암호 해독반의 지휘관이었던 조제프 로슈포르 중령은 ‘AF’를 ‘미드웨이 섬’이라고 생각했다. AH는 진주만을 뜻했다.

일본의 정찰기가 ‘AF 근처를 지나고 있다’라는 내용의 무선 보고를 해독한 적이 있던 로슈포르 중령은 정찰기의 비행경로를 추정한다.

이후 로슈포르 중령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일본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것과 AF가 자주 언급된다는 점을 들며  AF가 미드웨이 섬일 것이라고 보고한다. 아울러 미드웨이 섬의 담수 시설이 고장 났다는 내용의 가짜 전문을 하와이로 평문 송신하게 하자고 건의한다. 당시 미드웨이 섬의 정수 시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미드웨이 섬 / 출처=위키피디아

니미츠 제독은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이틀 후, 도청된 일본군 암호 중 ‘AF에 물 부족’이라는 내용이 해독된다. 미군이 흘린 정보를 일본이 믿은 것이다. 이로써 AF가 미드웨이 섬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는 미국에게 매우 큰 정보였다.

니미츠 제독은 부하의 건의에 귀 기울여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됐다. 그 정보를 통해 일본군 군함 등 측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대승을 거뒀다.

 

■ 리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능의 끝판 왕
무타구치 렌야는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일본 장군이다. 그는 1944년 버마 전선에서 임팔 작전을 강행하면서 ‘일본의 3대 오물’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무타구치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급 참모과정인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무타구치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사례를 남긴다.

무타구치 렌야 / 출처=위키피디아

무타구치는 1943년 3월, 버마 방위를 담당하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때 영국군이 인도에서 넘어와, 버마(현재 미얀마)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에 무타구치는 인도 진공을 강하게 주장한다. 또 보급이나 병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세운다. 바로 임팔 작전이다. 무타구치 휘하 부대장들은 모두 작전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밀어 붙인다.

무타구치의 작전대로 진공하던 일본군은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지역에 다다른다. 부하들은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다며, 회군을 건의한다. 그러나 무타구치는 ‘일본인은 원래 초식인’이라며 풀을 먹으며 진격하라고 명령한다.

또 부하들은 자동차 연료 등이 모두 떨어졌다고 보고한다. 이에 무타구치는 소나 말을 구해 물자를 옮겨가라고 명령한다. 그러면서 나중에 이동수단인 소와 말을 잡아먹으면 식량 문제도 해결 된다고 설명한다.

무타구치의 작전으로 6만5000여명의 병력 중 5만 여명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한다.

무타구치 렌야

이후 무타구치는 전범용자로 지목, 체포된다. 재판을 위해 싱가포르로 압송됐으나, 그의 ‘임팔 작전’ 때문에 오히려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이 반영돼 불기소로 석방된다.

▣ 임진왜란, 선조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군이 거침없이 북진해오자 15일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한다.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보다 원균을 더 신임했다. 당시 사헌부는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원균을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한다. 사헌부는 관리의 감찰 등을 주 업무로 하던 기관이다.

왜군의 침략 / 출처=전쟁기념관

그러나 선조는 크게 화를 내며 원균을 옹호한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거듭 원균의 탄핵을 주장한다. 하지만 선조는 모두 거절한다.

원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으로 알려진 ‘칠천량 해전’의 장수다.

1959년 7월 14일, 원균은 부산의 왜군 본거지를 급습하기 위해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나선다. 그러나 왜군은 원균의 급습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고, 교란 작전을 편다.

교란작전에 말려든 원균은 급히 뱃머리를 돌려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휴식하던 조선 수군은 왜군의 기습을 받는다.

칠천량 해전도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균과 여러 장수들과 적에 대응하지만, 적의 기습을 당해내지 못한다. 원균은 이후 육지로 탈출해 도망가지만, 왜군의 추격으로 전사한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건졌을 뿐이다.

 

■ 리더란 무엇일까

조선시대 명장으로 평가받는 곽재우는 도망가기 급급했던 일부 양반들과 다르게 의병을 조직해 적과 맞섰다. 또 선두에 서서 전투에 임했다. 니미츠 제독은 지휘관으로써 부하의 보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부하의 보고를 통해 전투에 대비해, 승리했고 어려웠던 전세를 역전했다.

리더는 ‘솔선수범’해야 하고, 조언과 충고를 바르게 새겨야 한다는 점을 이번 사례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먼저 행동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직의 리더라면 많은 책임을 갖는 자리에 있다면, 어려워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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