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돈은 아주 많으나 사람이 어리석을 경우에 일어난 실화實話다. 혼사를 앞두고 양쪽 집안 부모가 처음 만나는 상견례의 자리. 예비신랑 쪽 아버지는 명문대의 저명한 교수였고, 예비신부 측 아버지는 강남의 땅 부자 출신이었다. 두 집의 아들과 딸은 미국 유학중 만나 사귀다 결혼을 결심하고 한국에 와 양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간단한 첫 인사가 끝나자마자 딸의 아버지는 말했다. 

“사돈어른, 제가 강남에 아파트도 수십 채가 있고, 가진 땅도 수십만 평이 넘습니다. 사위가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수도 있고, 한국에 와서 살겠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가 있습니다. 돈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됩니다. 사위, 자네도 앞으로 돈은 걱정 말게.”

자리에 앉자마자 장래 며느리가 될 여성의 아버지의 그 첫마디에 아들 측 부모는 깜작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아들이 좋아한다면 두 애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결혼을 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왔으나 보자마자 안하무인격으로 느닷없이 돈 얘기부터 꺼내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식하고 돈이 많다는 게 그리 나쁜 일도 아니라고 평소 생각해 왔으나 처음 만나 서로 예의를 차리고 조심해야 하는 상견례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돈 얘기부터 들으니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 후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으나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말과 태도에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착잡했던 교수님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파하고 나왔으나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교수님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나는 너의 결혼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 아버지의 몰상식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네가 결혼을 피하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아예 호적을 파서 집을 나가라. 그리고 네가 굳이 결혼을 하겠다면 나는 부자父子의 인연을 끊겠다. 아들 하나 없는 셈 치겠다. 만약 네가 딸이었다면 그나마 결혼을 허락했을 것이다. 딸은 시집을 가서 그 집 사람이 되니 상관이 없다. 그러나 며느리는 우리 집에서 계속 살아야 할 사람이니 그렇지 않다. 내가 살아있는 한, 저런 집의 딸을 큰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더 신중히 생각해 보거라.”    

그 후 양가兩家 간에 수차례 연락은 오갔으나 두 집안의 결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졸부猝富 아버지의 많은 돈이 외국 유학까지 한 금지옥엽金枝玉葉의 혼사를, 집안의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여지없이 망친 불행한 사례의 하나다. 

어진 사람이 재물을 많이 가지면 그 지조志操를 손상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물을 많이 가지면 그 허물을 더하게 된다. 賢而多財則損其志 愚而多財則損其過는 《소학》 <선행>편의 가르침이 틀린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차라리 그 상견례 자리에서 “가르친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부족한 딸자식을 너무 예뻐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소학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소학》 <가언嘉言>에서도 전한다. “며느리에게는 집안의 성쇠가 달려 있다. 구차하게 한때의 부귀를 부러워하여 며느리를 삼는다면 그녀가 그 부귀함을 자세藉勢하여 그 남편을 가볍게 보고, 그 시부모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드무니, 교만하고 질투하는 습성을 기른다면 훗날 걱정거리 됨이 어찌 끝이 있으랴. 가령 며느리의 재물로 인하여 부자가 되고, 며느리의 권세에 의지하여 몸이 귀히 됨을 믿는다 한들, 진실로 대장부의 뜻이 있고 기개가 있는 자라면 능히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랴.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반드시 내 집보다 나은 집으로 보내야 한다. 내 집보다 나으면 딸이 그 집 사람들을 섬김에 있어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삼갈 것이다. 며느리는 반드시 내 집만 못한데서 데려와야 한다. 내 집만 못하면 며느리가 시보모를 섬김에 있어 반드시 며느리 되는 도리를 다할 것이다“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슐츠(1902~1998)는 《가난한 사람의 경제학》에서 “한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고 부자가 너무 부자이면 언제가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너무 많은 재산은 장물臟物과 같고, 남들은 없는데 혼자서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마땅하다. 부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A. 카네기(1835~1919)는 답한다. “부자인 채로 죽는 자는 치욕 속에 죽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말했다. “최고의 부자로 무덤에 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우리가 뭔가 중요한 일을 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

호주 출신의 저명한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1946~)는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부의 불균형 자체가 악이 아니지만, 부자가 빈자에게 불의나 해를 끼치고 있다고 강조한다. “전체 인구의 2%에 속하는 사람들이 전체 부富의 50%를 차지하고 있고, 가장 부유한 인구 10%가 전체 부의 85%를 갖고 있다는 그는 전체의 부가 파이처럼 일정한 양을 가지고 있다면 부자들이 많이 가져갈수록 가난한 자의 몫이 줄어든다.” 

가난은 누구의 죄인가. 나와 우리는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적은 없었던가. 또는 비참한 사람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장발장을 보고도 모른 채 지나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이라도 먹어서 그나마 목숨을 잇고 살기 위해 잠시 도둑이 된 경우 그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을 추궁할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친다는 것이 합리화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밥을 먹는다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협 받을 만큼 가난하다면, 그것은 그 개인의 무능이나 잘못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부자가 하나면 세 동네가 망한다.’는 속담처럼 국가적· 사회적· 경제적인 시스템이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자연에서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주장한 찰스 다윈(1809~1882)도 《비글호 항해기》에서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그 사회는 부유한 소수도 구할 수 없다.
(If a free society can not help the many who are poor, it can not save the few who are rich)”는 케네디 대통령(J. F. Kennedy)의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허버트 사이먼(1916~2001)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의 소득 90%는 사회적 자본의 덕이라고 정의한다. 효율적인 은행시스템, 치안시스템, 훌륭한 사법제도, 도로통신시설 등 사회적 간접자본 등의 조건이 없다면, 워렌 버핏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지적에 대해 워렌 버핏(1930~) 역시 “내가 방글라데시나 페루 사람이었다면, 내가 가진 재능이 잘못된 토양에서 자랄 때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흔쾌히 동의한다. 버핏은 언론과의 대담에서 “만약 내가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절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을 사회에 돌려 줄 것.”이라고 즐겨 말하며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고 있다.

워렌버핏.

최진립(1568~1636)부터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친 약 400년 동안 경주 최 부자 집은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의 가훈을 지켰다. 

육훈은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감동이상의 감동을 주는 교훈이다.

육연은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삼가서 고요하게 해라 △처인애연處人藹然 남에게는 따뜻하게 대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해라 △유사참연有事嶄然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처리해라 △득의담연得意澹然 뜻이 이루어질 때는 담담해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를 하더라도 태연해라. 기억해야 할 주자(1130~1200)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이다. “사람이 이익만을 추구하면 이익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그 몸을 해치고, 의義를 추구하면 이利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진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호암 이병철(1910~1987) 선생이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남긴 뜻도 크고 깊다. 자신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내공이나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가 결국 독서, 특히 《논어》에서 비롯됐다고 진정으로 토로한다. 

이병철 호암자전 / 출처=네이버 책

“어려서부터 나는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다독이라기보다는 난독을 하는 편이었다. 가장 감명을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바로 이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아아,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이라는 공문사과孔門四科의 기초를 정립한 위대한 고전 《논어》의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 우리는 본래 자질이 부족하고 배운 게 없어, 제자백가의 스승 공자와 십철十哲, 3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크게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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