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집권 5년 동안의 야심적인 100대 국정과제를 확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내세우는 문재인 행정부가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전망과 장래는 그리 밝지 못하고 불투명하다는 우려와 비판이 제기된다. 과거를 답습하게 될지, 과거와 달리 명실상부하게 그 이름값을 충분히 하게 될지는 차분히 지켜 볼 일이다.

청와대 전경

의욕에 차 새로 출범하는 정부들의 네이밍(naming)은 언제나 그럴 듯 했지만 그 결과는 초라했다. 작명은 결코 명실상부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참여를 내세운 참여정부에 국민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한 편 가르기를 해 참여보다는 오히려 비참여와 분열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5공화국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고 집권당의 이름도 민주정의당이었으나 집권 기간 동안 정의사회가 구현되었다거나 민주주의가 꽃 핀 정부였다기보다는 사실상 독재와 부패가 만발한 정권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국민성공시대를 내세운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부에서 과연 어떤 국민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장담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저런 실패한 국민이 더 많았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정권에서는 일부가 분명히 행복했겠지만, 불행을 느낀 다수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정권을 여지없이 붕괴시켰다. 우리의 대다수 정부가 자신이 내세운 이름값을 하지 못하거나 거꾸로 갔다는 비판과 반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여소야대의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정치 환경에서 여당은 집권을 한 책임 있는 여당답지 못하고 야당은 수권을 기대하는 야당답지 못한 모습을 자주 노출한다.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국민의 여망으로 이루어진 정권이라지만 집권여당의 행보는 오락가락한다.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은 아래, 위가 따로 노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상당수 의원들은 중대 현안에 대한 표결을 앞두고 국회에 출근하지 못했다.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허겁지겁했던 여당의 모습은 무책임한 자화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평가다. 따라서 국정 운영을 책임진다는 두 축인 당정 중의 하나는 그동안 국민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의심까지 받는 지경이다.

어쩌면 그 시급하다고 재촉한 일자리 창출, 추가경정예산 통과 문제는 결과적으로 당리당략적인 야당 압박용이었거나, 강 건너 불과 같은 남의 일이었다는 것을 자인한 꼴이 되었다. 아니면, 청년실업은 애석하게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인가. 소득재분배,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증세 논란, 원전 폐기문제, 담뱃값 인하 등 산적한 국정이슈들이 청산해야 할 정치권의 비정상적인 적폐로 인해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우려가 당연히 나온다. 결국 여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실패했거나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사실상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불멸의 고전 《손자병법》 <군형편>에서는 “상하동욕자, 승(上下同欲者, 勝).” 위와 아래가 함께 하는 자가 승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립이라는 국회의장은 여야 모두가 패자라고 준엄하면서도 정중하게 꾸짖고 여당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서면경고를 하고 진정성이 의심되는 변명과 사과를 하는 국회의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초록은 동색이고 팔은 역시 안으로 굽었다는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로서의 한 가닥 미풍양속의 정리를 보인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나.

손자병법

정치 주도세력의 변했으나, 정치판의 논리나 현실은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얼굴과 간판은 확실히 바뀌었지만 정치인들의 행태나 사고방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개탄도 무성하다. 새 정부 출범 초기의 높은 여론조사 지지도에 취했다거나, 논란이 큰 정책들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소리도 높다.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여당임을 실감하지 못한 여당은 전열을 미처 정비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자중지란 속의 야당은 야당노릇이 여당 하는 것보다 더 쉽다며 일치감치 패기를 잃고 안주한다. 미국의 상· 하원이나 일본의 중의원은 국가이익이 걸린 중대문제에 대해서는 여야를 떠나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압도적인 찬성으로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이 땅의 가련한 백성은 누구 믿고 살아야 하나.

10년 만에 우연인지, 행운인지, 운명인지, 정권을 다시 잡아 득의양양한 여당이나 촛불에 밀려 위축된 제1야당이나 역지사지하지 못하고,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은 오십보백보로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는가.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한다. 서로 제 얼굴에 침을 뱉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런 버릇을 가진 국회는 개혁의 주체가 될 것이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과연 우리 정치는 무엇이 달라졌고 앞으로 얼마만큼 변할 수가 있는지 암담하다. 여야 모두가 진정성과 신뢰, 리더십을 잃고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국정의 안정에 대한 불안심리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일그러진 교육을 받는 명문학교의 현실을 설득력 있게 비판한 명화로 기억된다. 영화에서는 천편일률적인 구습과 고착화된 전통, 고루하고 굴절된 규정 등에 함몰되어 거의 좀비(zombie)증후군 수준을 보이는 인간군상과 복지부동 이상의 죽은 현실을 인상적으로 그렸다. 수업시간에 책상 위로 올라가는 파격과 시(詩) 작법 교과서의 폐기를 외치는 역설은 신선하고 충격적인 감동을 넘어서서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정신과 의식, 철학을 감동적으로 상징한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기존 세력들에 의해 영화의 장면들은 상당히 비극적으로 구성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살아있는 정치인의 사회>는 오래 전 <죽은 시인의 사회>가 통렬하게 비판한 현실과 큰 차이가 없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정치인은 이른바 명문이라는 좋은 학교들을 나와 소속 진영, 특정 집단, 전공 분야 등에서 나름 능력을 발휘하고 경력 관리에도 성공적이어서 발탁이 되거나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유력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인재들이라고 보인다.

돈 많은 아버지나 훌륭한 부모를 만난 금수저의 상속자이건, 악전고투를 거쳐 자수성가를 했건, 정치로 이끌어 준 좋은 친구를 만났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았건, 우연이던, 행운이던, 운명이던, 막중한 국사를 감당하는 출세한 정치인들은 소위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이고 우수한 집단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정치는 생산성, 도덕성, 위기관리, 업적 평가 등에서 국민들의 기대치 이하, 또는 3류 이하라는 인색한 평가를 대체적으로 받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결국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

아폴로 신드롬(Apollo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있다. 아폴로 신드롬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집단에서 오히려 성과가 낮은 현상을 일컫는다. 영국의 경영학자 메러디스 벨빈(M. R. Belbin)이 《팀 경영의 성공과 실패(Management teams: why they succeed or fail)》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벨빈은 아폴로 우주선을 만드는 일과 같이 어렵고 복잡한 일일수록 우수한 인재가 모인 집단에서 높은 성과를 낼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연구를 진행했지만 실제로는 뛰어난 자들만이 모인 조직의 전반적인 성과는 별로 우수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죽은 정치인의 사회>에 사는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으로 삼아 성찰해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국회의원이라는 직책이 아예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자리라면, 국회에는 치부나 당파성 등을 중시하지 않고 의무와 명예를 그 무엇보다도 숭상하는 군현(群賢)의 운집(雲集)이 오히려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거나, 또는 많은 국회의원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대기만성(大器晩成)할 것이라는 언중유골의 농담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이미 세속적으로 크게 성공해 남부럽지 않은 득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 대기만성을 기대하는 것은 칭찬인가, 욕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의도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모습이다. 독주하는 여당이나 반대하는 야당을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은 막강한 특권을 누리는 체제내의 견고한 기득권 집단이다. 교수라는 지식인들도 유력 정치인이나 유력 정당에게 아부를 하고 대거 줄을 서는 세상이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반증한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변해야 산다. 파랑새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한다. 정치인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헌법 69조에 규정한 대통령의 취임 선서 내용과 <국기에 대한 맹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는 것”이다. 또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자세와 정신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정치인들이 이런 약속을 제대로 지켜 왔는지, 또는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나 지적· 정치적· 인간적 수준은 정권이 몇 번을 바뀌어도, 아마 상전벽해, 천지개벽을 거듭해도 특별히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상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해이기도 하지만, 과감한 국회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모습을 감안하면 국회를 국가 개혁의 원동력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회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성경》 <루가복음> 15장 11~32절에서는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판을 거창하게 벌이지만, 과연 그가 개과천선을 했는지 또다시 가출인지 출가인지를 감행했는지는 아쉽게도 알 수 없다.

야당이 절치부심이나 와신상담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난 시절의 야당은 드디어 여당으로 권토중래· 금의환향을 했다. 그러나 여당으로 돌아온 야당이 심기일전, 환골탈태해 굳건한 반석 위에 섰다고 모두가 믿지는 않을 것이다. 갈 길은 멀고, 국민들의 지지와 응원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라고 겸허하게 판단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어쨌든 용두사미 하지 말고 5년 후에는 성공한 정부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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