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만인이 만인에 대해 공격과 비난의 글을 마구 보낸다. 표현의 자유를 강변하면서 문자폭탄과 악플이 난무하는 시대, 시시비비가 호오와 이해관계에 따라 크게 엇갈리는 가운데 글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 글을 제대로 써보지 않아 글 쓰는 일의 어려움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악문이나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늘 괴롭다.

많은 작가들이 쓴다는 일의 어려움을 자주 말하고 모든 창작에는 엄청난 산고가 따른다고 한다. 옛 문장가들도 글쓰기가 쉽지 않아 의불승필 사무윤차 서지(意不勝筆 詞無倫次 恕之). 뜻이 글을 이기지 못하니 두서없음을 용서하시라는 글을 겸손하게도 편지의 말미에 붙이곤 했다. 또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이란 말이 오랜 세월 유행했다. 산문은 반드시 진한 시절의 글을 본받아야 하고, 시는 성당 때의 시인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김소월 시집/ 연합뉴스=공감신문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가 감동적이고, 금과옥조· 촌철살인을 거듭하는 높은 글을 쓸 수는 없을까.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 마치 100권 이상의 책을 한꺼번에 독파한 것 같은 뿌듯함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책은 없는가. 다만 책을 손에 잡은 후 놓지 못하고 밤을 새워 끝까지 읽게 되는 좋은 책은 적지 않았다.

눈을 뗄 수 없는 빼어난 문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구양수(1007~1072)의 삼다(三多)가 좋은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타고난 문재(文才)가 아무래도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마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어떤 유능한 작가는 작품의 상당 부분을 거의 하루 이틀 만에 쓴다고 한다. 이런 분은 진실로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한가로이 거처하니 이웃도 드물고(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 숲 오솔길은 거친 정원으로 통한다(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산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이 들고(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鼓月下門-승고월하문)”

당나라 때 가도(779~843)라는 문장가가 위의 시를 지어놓고 민다는 퇴(推)가 나을까, 두드리는 고(敲)가 나을까를 고민하며 걷다가 마침 행차를 하던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768~824)와 우연히 부딪혀 조언을 구하는 기회를 얻는다. 한유가 고가 낫다고 하자 그 말에 따랐다고 한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퇴고(推敲)의 유래다.

가도는 일자일구의 표현에도 섬세했고 매우 성실한 창작 태도를 가졌다고 한다. 마치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1821~1880)가 추구한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묘사는 하나밖에 없다’는 <일물일어설>의 주장을 방불케 한다.

진정한 글쓰기는 퇴고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글은 숙고해서 고칠수록 좋아진다는 것이 많은 문인들의 경험이기도 하다. 절창을 남긴 천재시인 소월 김정식(1908~1934)의 경우도 치열한 퇴고 과정을 보이는 기록을 남기고 있고, 작가 최인훈(1936~) 선생도 쇄를 거듭한 대표작 <광장>을 계속 수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글의 교정, 수정, 보충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글 쓰는 일은 완벽한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넘어야 할 산이나 계속 걸어야 하는 도상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글을 고쳐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글을 제대로 고치지 않는 악습에 물들어 있기도 하다.

《논어》에서는 옛 것을 말하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의미의 술이부작(述而不作), 불교의 설법에서는 내가 이렇게 들었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을 강조한다. 경전의 말씀들이 완벽한 창작이 아니라는 겸손한 얘기로도 이해된다. <복음서>의 좋은 글들도 《성경》의 기자들이 결국 각색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나의 미메시스(Mimesis), 모방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모방은 제2의 천성이다.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은 모방을 통해 배운다(아리스토텔레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는 말이 있다. 이른바 혼성모방기법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론으로 주목받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다. 텍스트 사이의 유기적 관련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프랑스의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가 1966년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이후 널리 쓰이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모든 텍스트는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1932~)의 《장미의 이름》은 상호텍스트성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유명하다. 에코는 이 작품을 “다른 텍스트들로 짜인 직물(texture), 일종의 인용문들의 추리 소설, 책들로부터 만들어진 책”이라며 “책들은 항상 다른 책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이미 행해진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에코는 자신의 작품이 혼성모방기법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창작행위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고 표절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창작은 광범위한 모방과 인용을 포함한 어떤 표절(plagiarism)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작가는 어떤 텍스트들의 독자라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며, 자신이 창작한 텍스트 역시 자신이 읽은 텍스트에 의존했거나 변형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견해는 더 나아간다. 저자는 중요하지 않고 이미 죽은 것으로 선언하며 독자만이 중요하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책 1권을 읽고 그대로 베끼면 명백한 표절이지만, 1만 권 이상을 읽고 소화해서 쓰면 재탕· 삼탕의 윤문이 되는지 또는 순수한 창작이 되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움베르토 에코

우암 송시열(1629~1714)의 대척점에 서서 조선 후기의 정치사를 이끈 대선비 윤증(1629~1714)은 글쓰기를 두려워한 모양이다. “저술이 어찌 나 같은 후학이 할 일이겠는가...성현의 가르침이 잘 구비되어 지금까지 후세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또 정자, 주자 이후에는 달리 저술할 것이 없다.”

“여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도 아니다.” 러시아 속담이다. 오래 살아남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잘된 글의 저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글을 읽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지적이 아닌가 한다.

결국 좋은 독자가 좋은 저자가 될 것이다. 한 동이의 물을 붓는 순간 댐이 터지고, 한 삽의 모래를 더하는 순간 모래 산이 일시에 무너지는 어떤 임계상태의 경지에 서야 감동적인 글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독서와 공부가 부족한 우리가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인 글을 쓴다는 것을 감히 운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자신을 크게 탓하지 말라는 현인들의 여러 말씀들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생활의 발견》으로 문명을 떨친 임어당(1895~1976)은 “마누라는 남의 마누라가 나아 보이고, 책은 자기가 쓴 책이 가장 좋게 보인다.”고 말했고,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밀란 쿤데라(1929~)는 “모든 저술가는 책이 몇 권이나 팔렸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시시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무조건 위대한 것이다.”고 한다.

심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불구심해(不求甚解).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에 나온다. 우리는 때로 매사를 너무 심하게 해석해서 글의 내용이 어려워지고 더욱 난감해지는 것은 아닌지...심장적구(尋章摘句)는 책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글쓰기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견해가 다수를 이룬다. 퇴고의 주역이기도 한 한유는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진학해>라는 글에서 “옛 책을 뒤져 문장을 도둑질 한다”는 매서운 비판도 남겼다. 마치 재귀영거(載鬼盈車)와 같다.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닌다. 죽은 이들의 이름을 글에서 한없이 나열하는 것을 말한다. 박관약취는 널리 섭렵하여 잘 요약하는 것으로 글쓰기와 학문의 기본으로 권장되기도 하나 과연 옳기만 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용휴(1708~1782) 선생이 <방화고서(訪花稿序)>에서 “제 목소리로 우는 가을벌레의 울음소리가 혀가 잘린 앵무새의 노래보다 낫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남의 글을 적당히 인용하고 따라 쓰는 것이 정도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김만중(1637~1692) 선생의 《서포만필》의 주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이제 우리나라의 시문은 제 나라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니, 설령 십분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는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고, 우리는 아는 것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생각하고, 자기 그릇만큼의 물을 떠서 마시기 마련이다. 따라서 식견과 인품이 높아야 필력도 높다고 보인다. 글에서는 그 사람의 고상함과 속됨이 드러난다. 서권기와 문자향이 가득 차야 좋은 글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품을 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글쓰기의 어려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인간성과는 추호의 관계도 없이, 인터넷의 지식 검색엔진을 통해 글쓰기가 한결 편한 세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단서만 기억하고 있으면 원전과 풍부한 자료를 쉽게 찾을 수가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장조(1650~?)는 《유몽영》에서 말한다. “고금의 지극한 문장은 모두 피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궁이후공(窮而後工). 궁해진 뒤에야 좋은 시가 나온다고 한다. 좋은 시는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쓸 수 있다. 불행한 고통의 어린 시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정무문(至情無文), 지애무사(至哀無辭), 지정(至情)이면 무문(無文)이라는 말도 존재해서 헷갈린다. 지극한 정은 표현할 글이 없고 지극한 슬픔은 나타낼 말이 없다. 소위 너무 힘들면 시를 쓸 수 없다는 절처불능시(絶處不能詩)의 경지다. 글 쓰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몽영/ 출처=리디북스

이제 인공지능이 주목되는 시대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이 진화를 계속해 성당의 시인 두보(712~770)처럼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나의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다는 자부를 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작은 칩 하나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글과 책을 알고 난 후 글쓰기에 나선다면, 진정한 창작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노벨상을 받거나 각종 문학상을 석권하게 될 날이 멀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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