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판사, 검사, 교수, 경찰, 기자, 술집 마담(기생)이 함께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나중에 술값 계산은 누가 했을까. 다들 술값 내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아 성질 급한 마담이 참다못해 계산을 했다는 오래 전의 농담이 있다. 기생도 자기 돈으로는 술을 안 마시지만, 그들은 자기 돈을 쓰지 않고 대접을 받는 버릇에 익숙한 직업을 가진, 우리 사회의 잘 나가는 대표적인 갑들에 속한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는 가운데 소위 금수저, 출세한 자, 성공한 자, 승리한 자, 강한 자, 가진 자들이 거의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무력한 약자나 없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를 포함한 다양한 사례들이 이른바 갑질로 평가돼 심각한 사회적·법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前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 연합뉴스=공감신문

만연한 갑질은 가해자라는 갑들의 약육강식에 길들여진 특권의식, 오도된 승자독식에의 무비판적 도취, 이기적인 탐욕에의 함몰, 인간의 존엄과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모르는 심성의 황폐함 등이 핵심을 이룬다고 보인다. 피해자라는 을에서는 상대적 박탈감, 위화감, 억울함, 분노와 적개심 등이 첨예화된다.

의식은 족해도 예절을 모르는 인간들이 발호하는 세상이 갑질 하는 세상이다. 인간을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나 짐승으로 취급하는 개탄할 풍조다. 빈발하는 갑질은 때로 거의 테러를 방불케 하기도 하고, 사실상의 자살 강요나 방조, 정신병 입원을 초래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갑질은 국회의원(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학교, 검찰, 군대, 재외공관, 가정과 직장, 비행기 안, 승용차 내, 아파트 단지, 길거리 등을 가리지 않고 밤낮 없이 차고 넘친다.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각박한 세상에서 인생이라는 길을 건너는 동안 우리는 과연 갑이었나, 을이었나.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어떤 가해자였나, 또는 어떤 피해자였나. 승리자였나, 패배자였나, 강자였나, 약자였나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쉽지만,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또 아직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옳고 현명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품이나 배운 것이 보잘 것 없는 우리가 만약 갑의 처지였다면 당연히 갑질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다만 갑의 여건이나 처지가 되지 않아 갑질을 못했을 뿐이 아닌가 한다. 다만 안 한 것보다는 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리가 아주 비상해 좋은 학교 나와 출세를 했거나, 적수공권의 처지를 일찍이 깨달아 각고의 노력 끝에 자수성가를 한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아버지를 만나 함부로 설치는 철없는 재벌2~3세도 아니었다.

부모들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었다는 흙수저의 이런 한계나 사실들이 우리가 갑질을 하지 않았다는 유효한 변명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진화의 관점에서 본 홍적세의 간빙기를 사는 현대의 인간에게는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충동이 발현되는 파충류의 뇌가 본래 남아 있는 것이라고 자위를 해야 할 것인가.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365~427)은 41세 때 평택현 현령이 되었을 때 아들에게 종을 보내면서 이런 편지를 쓴다. “...나무 하고 일손 돕는 종을 보낸다. 그도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우해야 한다(此亦人子也 可善遇之)...” 김훈 (1948)작가의 빼어난 소설 《흑산》에도 맥락이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세상에는 근본이 있다...다스림은 선해야 한다...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누구나 천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을 때리지 말고, 그 생명에 해악을 가하지 마라...마부는 귀한 사람이다. 잊지 마라.”

모든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갑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을이 되는 야누스적인 속성도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남에게는 엄격했고 자신에게는 늘 관대했다.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의 반대로 살았다. <황금률>은 자신이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고 했으나 영광은 나에게 책임은 남에게 미루었다.

또 우리는 힘없고 무능해 보이는 자들을 자신은 유능하다는 착각으로 마구 짓밟고 비웃었다. 착해 빠진 선량한 자들을 조롱했고 약자들의 처지를 교묘하게 이용해왔다. 이처럼 갑질은 우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이 저질러 온 적폐이자 악습이기도 하다.

메두사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나 우리나라에 시집을 온 가련한 외국인 며느리들에 대해 우리 한국인들은 폭행이나 부당한 대우들을 서슴지 않는다.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이 겪는 차별도 심각하다. 이런 우리가 과연 갑질에 대해 돌을 던질 자격이나 있는지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소중한 몸은 물론,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까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피눈물을 흘리며 고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한국인들을 깊이 증오하며 아마 평생 동안 그 원한과 복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으나 결코 효자 노릇은 못했다. 죄 없는 부모는 언제나 을이었고 못난 자식은 오로지 갑이었다. 애프터서비스를 넘어서 무한리필을 요구하는 자식이란 것은 부동의 유리한 고지였고 대단한 벼슬이 아니었을까.

애비는 낮은 종이었고 남들로부터 영식과 영애라 불리는 자식들은 높은 양반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에게는 우선 끝없이 주기만을 강요하고 베풀지를 도무지 못했다. 지금은 늙은 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자식이 크게 늘어간다는 소식이다. 자식들의 갑질에 말세가 따로 없는 형국이다.

시골의 소 팔고 땅 팔아달라고 부모를 졸라서 서울로 유학(遊學)인지 유학(留學)인지를 온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출중한 인물은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하지만 재능이나 인물이 못생긴 자들은 고향에 남아야 한다. 서울로 갔다가 결국 귀향하면 기껏해야 수구초심이거나 돌아온 탕자밖에 더 되겠는가.

모두들 무작정 상경하니 소는 누가 키웠나. 누군가 이름 없는 을들이 키웠을 것이다. 아마 그 때 그 소나 그 땅을 학자금 등으로 팔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유산을 그나마 지켜 어쩌면 면장도 지내고 부자가 되어 지역 유지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으리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공부나 진학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어떤 친구는 아버지로부터 직업을 이어받고 고향에서만 살았다. 그는 결국 팔지 않았던 수 만 평의 전답과 임야 등을 밑천으로 삼아 지금은 거의 재벌 수준이 되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에 와 오래 산 것이 과연 좋은 일이었나. 어쩌면 폼을 잡고 노는 건달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오가는 꼴은 아니었을까. 출세라는 허위의식에 빠지기보다는 그저 향리의 소인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급식이 되지 않았던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계란 프라이가 들어있는 도시락을 은연중 자랑하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거나 보리밥에 김치만이 보이거나 반찬이 부실한 친구들을 무시하기도 했을 것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밤샘 벼락치기라도 해서 100점을 받았을 때는 점수가 나쁜 아이들은 인격까지 못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반장이나 부반장을 하면서 동기들에게 자신이 하기 싫은 일들을 강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키가 작고 몸이 약한 친구들에게 주먹질도 하고 횡포도 제법 부렸을 것이다.

명문대가 아닌 시원찮은 잡대를 나와 특별한 목표나 꿈도 없는 직장 생활 중에는 주면 주는 대로 월급을 받았지만 신입사원에서 간부사원에 이르는 오랜 세월동안 알게 모르게 갑질도 많이 했을 것이다. 어쩌다 생기는 공돈이나 부당한 소득은 처음에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정당한 재물이 아니라며 돌려주고 경멸하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액으로 매수 가능한 자라는 평가는 없었을까.

사표도 내 보기도 했으나 미운 털이 박힌 부하직원으로부터 사표를 받아 별다른 고민도 없이 무책임하게 그대로 상사에게 전한 일도 없지 않았다.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졸지에 백수가 되어 고정수입이 갑자기 끊어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나갈 곳이 없다는 것이, 혹시 아이들은 등록금을 제 때 내지 못하고 배가 고파 울고 있지나 않았는지...회사를 그만 두고나간 후배가 지금은 아주 잘 되었지만 그 때 그 친구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는 얘기를 훗날에 전해 듣고는 땅을 치며 사표 받은 일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아랫사람의 사표를 직접 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모습일 것이나 안 털어도 먼지가 푹푹 인다. 그 때는 갑질이라는 말은 없었으나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해보니 어쨌든 갑질은 많았다. 직장이나 사회생활 중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강했고 강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해 아부도 많이 했을 것이다.

약자에게는 오만방자, 안하무인이었으나 돈 많은 강자에게는 알아서 기며 고분고분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워 특히 힘 센 자, 가진 자들의 불의를 응징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으며 추호도 정의롭지 못했다. 또 정의(正義)로 돈과 인간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돈으로 인간과 정의를 즐겨 심판했다. 한 솥밥을 먹는 동료들을 가족처럼 각별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같이 잘 살아 보자는 을들이 벌이는 치열한 노조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은 경력도 없다. 오히려 갑이라는 사주(社主) 편에 서고자 하는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물욕은 없지 않았으나 갑으로 군림해 출세 길을 달리며 호의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누구들처럼 달러나 금괴를 집안에 가득 쌓아둔 일은 결코 없었다. 갑들이 가진다는 명품을 상당히 부러워했으나 실제로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여느 갑들처럼 돈과 권력을 차지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별 인연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도 상당히 서글픈 일이었다.

자질도 크게 모자랐고 배운 것도 없었고 무식해서 참 용감했다. 말이나 행동은 거칠었다.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갑질도 많았을 것이다. 고백한다는 갑질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갑과 을을 떠나 나쁜 놈이었고, 죄인이었고, 참담한 패배자였다. 그러나 많은 나의 갑질들은 운 좋게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폭로되지 않아 망각의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성해야 할 일들만 수북이 남아 있는 용렬하고 비겁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거의 자포자기의 절망만이 남는다. 죽기 전에 갑질 같은 것이 아닌, 참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세상에 남길 수나 있을까. 그나마 시성 두보(712~770)의 말에 스스로 위안을 찾고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심정이다. “사람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음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정해진다(丈夫蓋棺事始定).” 그러나 불행히도 지나간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짧을 것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니 어떡하랴.

영화 신부수업 스틸 컷

지난 날 내가 저지른 큰 죄들과 숱한 잘못, 허물들에 대해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하고 깊은 사죄를 올린다. 어리석고 부족한 나로 인해 심한 고통과 상처를 받았을 많은 분들에게 엎드려 용서를 빈다...지금 아는 것을 젊은 날의 그 때도 알았더라면 그런 실수와 과오들은 없었을 것을...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기도에 기도를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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