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부끄럽지만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생업 삼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일에 매우 세세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론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껏 어떤 일이나 현상을 겪거나 지켜보면서 그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생각하고는 글을 썼다. 어떤 것들은 몇 년에 걸쳐서, 아니 실은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내 눈은 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차곡차곡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쪽의 안구는 깎이고, 어떤 쪽은 확장이 된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세한 일들이란, 요즘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건들이다. 물론 굵직한 뉴스들은 알고 있지만, 우리 이웃들이 겪는 갖가지 문제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몇 달 전부터 다시금 시사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은... 범죄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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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느 시대에나 범죄는 있었다. 우리의 삶이 다양해지면서 범죄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범죄의 이유와 목적이 다양해지는 것은 단순하게, ‘오- 이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고 다양한 성격의 범죄자가 존재하는군!’하고 넘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한편으론 매우 무시무시한 일이다.

이전에는 배고파서 도둑질을 했다면, 이젠 남의 것을 뺏는 이유가 수백 수천가지라는 것이다. 과거엔 어느 남자 아이가 동네 여자 아이에게 호기심을 가지다가- 충동적으로 그 여자 아이에게 나쁜 짓을 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지금은? 그 남자 아이의 친구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그런 나쁜 짓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예시도 실은 이미 1-20년 전부터 있어왔던 유형일뿐더러, 지금은 더 다양한 악행의 이유가 존재한다. 아니, 그것들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있었더라면 괜찮다. 하지만 이것들이 숨을 쉰다는 얘기다. ‘왜 이런 짓을 했니?’라는 질문에 그 자질구레한 이유들이, 숨을 쉬며 두 발로 그 이의 입에서 걸어 나온 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인간은 정말 나약하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간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알게 모르게 계속-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사회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제>, Keith Haring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선에 매우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과 매우 가까운 배우자나 자식 등 가족 및 측근에게 상이하게 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에게는 이런 ‘해소’가 필요한 것이다. 왜? 밖에서 행동하는 매우 다른 자아는 본인이 아닐 테니까. 진짜 ‘나’라는 사람의 균형을 찾기 위하여 그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거다.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그만큼 나약하다는 이야길 하고 싶다.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큰 숙제라고 느껴진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나에게 종종 상담을 요청하곤 한다. 물론 나 역시도 내 마음을 다스리고 컨트롤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린 모두,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싶어진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에도 사랑이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더욱 크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정작 자기 마음도 컨트롤이 안 되면서.

하지만 자신의 마음도, 상대방의 마음도 스피커 볼륨처럼 줄였다 키웠다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거기 그 크기로, 있을 뿐이다. 이걸 알고 나니 어느 순간, 나는 그저 내 마음의 상태를 빨리 캐치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우리가 ‘악행’이라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살고 싶어 한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다거나, 사랑을 주고받는다거나- 혹은 미움을 받고자하는 것 역시도 ‘관계성’이 인간에게는 매우 본능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악행을 바라보며 내가 ‘비참함’을 느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조급함’이었다. 지금도 어느 사회는 그렇겠지만, 예전에 해외의 어느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 사는 이들의 상당수가 몸을 팔거나 그런 일의 뒤를 봐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었다. 그들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다고도 들었다.

<Andy Mouse 4>, Keith Haring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아니다. 악행을 저질러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심지어 돈을 이미 벌만큼 벌었음에도 더 벌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원하는 ‘돈’의 의미는 조금 남다르지 않을까. 그들 역시도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최소한 자기 삶의 만족도가 한 단계 이상은 높아질 거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이런 조급함이 보편적이진 않았다. 사회에 나와 차근히 돈을 벌어 형편이 조금 더,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차근히- 차근히- 나아지는 것은 너무 느리다. 아니, 안 나아질 확률도 매우 높다. 돈을 차분히 번다고? 아니- 빨리 벌어야지! 이게 현실적으로 더 현명하다고 느껴지지 않나.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책임져주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전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적폐청산이 완벽해진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나는 한편으론 매우 기운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것을 더 빨리 현실화하기 위하여 악행을 저지를 확률이 높은 환경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밖에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거다, 그게 제일 쉽다고 여겼을 거다. 이런 생각들을 이해하는 나 역시도 부끄럽고 비참해진다.

<The Story of Red and Blue Lithograph on paper> = Keith Haring

나는 어느 종교 경전에서나 나오는 천국은 바라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 그것 또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사회가 있다면, 국민들을 철저히 속이고 있는 더욱 부패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내가 꼬여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솔직한 마음은 이러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더 많은 고민을, 그리고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어지는 이 분위기엔- 개탄스러운 심경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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