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소방관들의 숭고한 자기희생을 눈물에 젖어 깊이 애도한다. 화재 진압 작업 중 안타깝게도 순직한 고(故) 이영욱(59) 소방경과 이호현(27) 소방교의 영전에 <소방관의 기도>를 다시 보내며 오열한다. 

故 이영욱 소방경과 이호현 소방경 영정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 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저에게는 언제나 안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화재나 대형사고가 일어난 비상상황의 재난 현장에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소방관들은 의인(義人)이자 영웅들이다. 소방관들의 힘든 작업은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나서야 하는 특공대, 기동타격대를 방불케 하는 그들은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에서 생사를 초월한 고귀한 소명을 실천한다. 

장렬한 산화(散華). 그들의 죽음은 호국선열이나 전사한 군인, 애국지사의 순국(殉國)에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가 않다. 따라서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하나의 성직(聖職)이거나 성직 이상의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하는 소명(召命)이다. 

화재나 대형사고가 일어난 비상상황의 재난 현장에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소방관들은 의인(義人)이자 영웅들이다.

출동한 그들은 무섭게 확산되는 불을 끄기 위해, 또는 소중한 인명을 구하기 위해, 보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운명을 용감하게도 내던진다. 비겁한 인간은 여러 번 죽지만 용자(勇者)인 소방관들은 오직 한 번 죽는다. 과감하게 불길 속에 들어가는 기개의 결단을 내린 소방관들은 차마 불에 타서 죽지는 않는다. 

불이 난 특정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로 인해 공기의 농도가 순간적으로 변하는 순간, 분투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실신하며 끝내 유명을 달리 한다. 또는 화재를 진압하거나 남은 불, 꺼진 불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다가 화마에 의해 구조적으로 약해진 천장이나 벽의 붕괴를 미처 피하지 못해 참사에 직면한다.

소방관을 찾는 SOS, 119 출동건수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06년 20만 여건에서 2015년 63만197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75만 건을 돌파했다. 현재 1일 출동건수(2016년 기준)는 2074건으로 2015년에 비하면 20.1%가 증가했다. 소방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인원은 2015년 12만393명이다. 하루 평균 330명 정도가 소방관의 구조 활동으로 목숨을 구하는 셈이다.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구급 활동 건수는 2003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해 지난 2015년에만 170만 건이 넘는다. 이러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소방관의 숫자는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소방방재청의 인력 집계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소방기본법이 정한 필요한 현장 소방 인력은 모두 5만1714명이나 현재 1만7174명이 부족한 상태다. 

故 이영욱 소방경과 이호현 소방경의 영결식 모습

특히 소방 공무원 정원을 2014년 815명, 2015년 1297명, 2016년 610명을 각각 채우지 못해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다. 따라서 소방관의 일인당 업무 강도는 계속 가중된다. 현재 3교대 근무를 하는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주당 근무시간은 주 56시간으로 일본 40시간, 프랑스 48시간 등에 비해 상당히 길다. 

2교대 근무를 하던 2014년의 경우는 84시간이었다. 이 같은 격무와 열악한 근무여건은 소방관들의 비극이 계속 늘어나는 원인의 하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순직한 소방관만 51명이다. 화재 현장 등에서 부상을 입은 소방관도 3112명에 이른다. 참혹한 죽음을 자주 목격한 정신적 충격이나 악몽, 후유증 등으로 자살을 한 소방관도 올해에만 10명이다.

이처럼 격증하는 소방방재 분야에 대한 수요에도 불구하고 소방· 재난 방지 전문가인 소방관에 대한 처우나 인식은 여전히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또 일종의 비상사태에 해당하는 각종 재난에 대한 대처나 위기관리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안전 의식이나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라거나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라는 위상이 부끄러울 정도의 후진국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태풍· 홍수· 가뭄 등의 기상이변이나 대형 지진 발생 등 천재지변에 대한 준비나 대책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더구나 많은 대형사고나 재해들이 관리자들의 관리부실이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적절한 예방조치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실상의 인재(人災)라는 평가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소방관들의 순직은 돈으로나마 추후에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집안의 가장을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된 늙으신 부모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한층 더 먹먹해진다. 

성실한 가장이었던 순직 소방관이 갑작스럽게 남기게 된 아이들과 아내는 국립묘지를 오가며 그가 남긴 명예와 헌신, 상훈의 기억만을 쓸쓸히 되새기며 아버지와 자식, 형제가 없는 오랜 세월을 가난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정치인들이나 당국자들은 순직 소방관에 대해 만시지탄의 일 계급 특진, 훈장 추서 등의 예우와 보상을 앵무새처럼 운위하지만, 실제의 보상액이 그 고귀한 희생의 대가(代價)로 어울린다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최근 정부에서는 특별 위로금을 따로 지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족들의 고통과 상처를 위무하기에는 금전적 보상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해 보인다. 최근에는 해난사고를 비롯한 각종 사망사고의 경우, 사안에 따라서는 10억여 원이 훨씬 넘는 보상을 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미국 정부는 지난 2001년 뉴욕 9· 11 테러의 희생자 구조 작업 과정 등에서 숨진 소방관, 경찰관들에게 1인당 평균 40억 원 이상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16년이 지난 지금, 소방관들의 순직 보상금은 아마 50억 원을 상회할 것이다. 미국인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소방관들은 평소에도 대단한 존경과 예우를 받는다. 미국 청소년들의 직업 선호도 설문조사에서는 장래 희망 1위가 소방관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재난의 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희생과 봉사를 존중하고, 정의와 공익을 실천하는 미덕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의 저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설명되기도 한다.   

911 미국 테러 당시 구조작업중인 소방관들의 분투하는 모습 / 사진=CNN

이런 현실과 추세를 조금이라도 감안한다면, 소방관의 순직은 일반적인 산재 사고와도 구별해 매우 특별한 거액의 보상을 하는 획기적인 대책이 새로 마련되어야 한다. 특히 이와 관련된 새로운 법률의 제정· 개정 등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착한 소방관의 유족들이나 열악한 처지를 참다못한 현직 소방관들이 파업을 하고 촛불을 들고 대규모 극렬시위라도 굳이 벌여야만 보상액을 인상할 것인가. 선제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정부 당국의 복지부동, 늑장 행정, 무능을 새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예산이 부족하다면, 고위 공직자들이 용돈이나 쌈지 돈으로 마구 쓰기도 하고, 많은 경우 수십억 원에 이르기도 한다는 소위 특정업무경비나 판공비 등으로 줄줄 세는 국민의 세금을 우선적으로 아낌없이 투입할 것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과거 혹독했던 일제 강점 시대의 애국열사, 독립투사들의 자손들이 나라를 되찾았다는 광복 이후에도 부모의 부재나 가난 등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등 3대가 심하게 고생했다는 일들이 오늘날에 다소 변한 형태로나마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간판과 얼굴은 늘 바뀌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행태는 크게 변하지 않는 비슷한 궤적들을 그린다. 

순국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뤼순(旅順) 감옥에서 고초를 치르고 있을 때, 친지들로부터 가족들이 매우 어렵게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정 어렵거든 아이들을 일단 고아원에 맡기시오”라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는 슬프고도 숙연해지는 일화가 상기된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낸다? 만약 순직한 소방관의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그런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빠진다면, 가장 의로운 일들을 하다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소방관들은 아마 지하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도 모자라는 피맺힌 원한(怨恨)으로 남을 것이다. 

원통하고 억울한 이런 결과가 가련한 유족들에게 만에 하나라도 초래된다면, 이런 것이 과연 정의(正義)냐? 이게 나라냐? 이런 게 우리가 지켜야 할 공동체냐? 라는 비감과 분노, 나아가서는 심한 무력감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우리 사회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소방관을 결국 두 번 죽이는 무참한 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초보은이나 상부상조를 거창하게 거론할 필요도 없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을 하게 하자는 것도 아니다. 천붕지통, 할반지통, 참척이라는 절망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소방관의 유족들이 조금이라도 더 잘 살 수 있도록 우리가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가 지켜야 할 원칙이자 윤리다. 또 적절한 보답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책임이자 최소한의 도리라는 얘기다. 

1989년 퓰리쳐상 수상작

사람이 산다는 것이 사실 별게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돈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돈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정도로 팍팍하고 각박한 세상이다. 돈이 없이 더욱 막막해질 생계를 걱정하며 그들이 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원망스럽고 너무 두렵다. 아아, 깊이 개탄한다. 사랑하는 그대들은 선하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안락하고 세속적인 행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끝내 부자(富者)가 되어 살지 못하는 이런 시시한 세상을 어찌 ‘헬 조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시원한 물가에 나를 눕혀주고 내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오. 화재는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마지막 가는 그들의 영결식은 그들의 짧은 생애를 한없이 슬퍼하는 동료 소방관들의 비통한 울음과 조사(弔辭), 조화(弔花)의 끝없는 잔향(殘香) 속에서 엄수되었다. 지상(地上)에서 영원(永遠)으로 떠난 이영욱, 이호현. 영면한 님들의 위대한 이름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부디 불길이 아닌 편안한 길을 걸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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