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예전 우리가 살던 고향 마을! 그곳에 들어서면 어귀에서 집 앞까지 비포장 S자모양의 굽은 길에 장승, 서낭당, 작은 돌다리, 실개천 등이 있어 포근함과 아늑함으로 늘 편안했다. 우리 조상들은 궁궐, 왕릉, 서원, 향교, 마을 입구의 길목에 실개천을 가로질러 돌다리를 놓았다.

궁궐은 외부 침입자나 각종 질병, 악한 귀신, 나쁜 기운의 유입을 사전에 차단해 궁궐과 그곳에 사는 이들의 안전을 지키고자 상징적인 아이언 돔(Iron Dome) 형태의 방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늘로부터 들어오는 악한 것들은 지붕의 처마마루 끝자락에 위치한 삼장법사, 손오공 등의 ‘잡상’과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인 ‘망와’로, 지상과 물길을 따라 들어오는 악한 것들은 금천교(禁川橋)에 각종 서수(瑞獸)를 배치해 설치한 상징적인 검문소로 차단하고 있다.

2017년 여름. 큰 덕과 물이 넘쳐흐르는 금천과 금천교

금천교는 풍수적인 명당수와 궁궐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십자로다. 이 다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속적인 세상과 신성한 영역인 천상의 세계를, 궁궐의 안과 밖을 경계 지으며 백성과 임금을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임금을 만나러 들어감에 있어 먼저 맑고 깨끗하게 흐르는 명당수에 세속의 더럽고 사악한 것들을 씻어버리고 정결한 마음을 갖춘 뒤 지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궁궐의 금천교는 각각 이름이 다르다. 경복궁은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 창덕궁과 경희궁은 금천교(錦川橋), 경운궁은 금천교(禁川橋)라 부른다.

창덕궁은 임금이 백성들에게 창성한 덕을 베풀어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했던 곳이자 서울소재 5대 궁궐 중 가장 사랑받았던 궁궐이다.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면서도 산세에 의지해 자연과 잘 어울리게 건축돼 1997년 12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궁궐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데에는 금천교의 조경도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창덕궁에는 현재 두 개의 맑고 아름다운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하나는 옥류천에서, 또 하나는 후원 다래나무 쪽 옹달샘에서 발원해 흐른다. 이 실개천에 흐르는 물은 비단처럼 아름답다해 비단 금(錦)자를 써 금천(錦川)이라하며 이 금천은 청계천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금천 위에 놓인 금천교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세속인들의 발에 밟히면서 또 그것을 인내하면서 주위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면들을 의연하게 지켜보면서 제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태종실록에 금천교는 “누각(樓閣)과 침실(寢室)을 창덕궁에 짓고, 또 진선문(進善門) 밖에 돌다리(石橋)를 놓았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박자청(朴子靑)을 시켜 그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으로 1411년 진선문과 함께 건축됐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금천교

서울 소재 궁궐의 건축물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거의 다 불타 버렸다. 일제강점기에도 의도적인 ‘조선의 흔적 지우기 정책’으로 불타고 헐리고 훼손된 건축물이 많았다. 석재를 사용해 만든 금천교 역시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자동차 길 확보 문제와 또 다른 이유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본래의 모습에 가깝도록 제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금천교 앞에 서면,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의 축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2001년부터 2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볼 때, 일제 때 원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왜곡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의 유물 가운데 관심이 더욱 가는 것은 벼루, 옥비녀, 조선 숙종 이후 합법적인 주화인 상평통보의 일종인 당일전과 당백전 등이다. 인정전에서 자주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급히 과거 시험장으로 가는 유생들의 봇짐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금천교는 2012년 3월 보물 제 1762호로 지정됐다. 다리의 모양은 두 개의 무지개모양(홍예=아치) 교각에 멍에 돌을 올리고 돌난간을 세우고 주위에 각종 서수(瑞獸)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다리 상판은 금호문 쪽에서 숙장문 쪽으로 장대석을 중앙 부분이 볼록하게 솟은 모양으로 삼도를 깔아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지나가도록 했다. 

돌다리의 너비는 임금이 타는 가마인 대연이 통과하면서 좌우의 호위군사가 함께 행진할 수 있을 만큼 넓게 만들어져 있다. 다리 난간에는 큼직한 통 돌로 만든 판석(널판지 모양 돌) 가운데와 양쪽에 균형 있게 동자석 기둥을 새겼고 가운데는 안상(코끼리 눈 모양)으로 구멍을 내어 다리의 아름다운 감각을 살려 내고 있다. 

다리에 장식된 서수들은 아름다운 정치가 펼쳐질 때 나타난다는 여러 종류의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들로 돌을 투박하면서도 조화롭게 잘 다듬어 장식해 물길이나 육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상징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네 귀퉁이 엄지기둥의 서수는 얼굴과 몸체 꼬리의 생김새가 틀림없이 사자를 닮은 모양으로 전형적인 산예(狻猊)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서수는 중국 전설속의 용이 낳은 아홉 자식 가운데 사자를 닮은 용의 형태로 천성이 불과 연기, 그리고 앉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주로 향로 하단에 새기는 전설상의 맹수다. 입구 기둥 상단에 배치된 두 마리는 정면 금호문 쪽을 바라보며 ‘혹시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않나’ 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 모습이 압권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리 주위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았으리라. 숙장문 쪽의 두 마리는 길 가운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표정이 덤덤하면서도 진지하고 여유가 넘쳐나 보인다. 퇴궐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친절한 작별의 인사를 하는 듯하다.

금천교 네 개의 엄지기둥 위의 산예(狻猊) 사자머리와 꼬리 장식

다리 좌우 난간 아래 멍에 돌 끝부분에는 환조(丸彫)로 조각한 용머리를 닮은 서수를 좌우에 각각 4기씩 돌출시켜 장식함으로써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금천교 관람에서 해설을 듣지 않으면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이 다리 아래 서수들이다. 많은 관람객들은 다리 아래쪽은 내려다보지 않고서 그저 정면만 바라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서수들이야말로 해설을 들으면 들을수록 관람의 묘미를 더해 준다. 

다리 하단을 내려다보면 홍예의 발굽이 서로 만나는 교각 밑 남쪽에는 남 주작(朱雀)에 해당하는 백택모양의 서수가 남향으로, 북쪽에는 북현무(玄武)에 해당되는 거북이모양의 서수 한 마리가 북향으로 배치돼 있어 주로 물을 타고 들어오는 부정한 것들을 막고 있다. '하얀 못'이라는 의미의 백택(白澤)은 전설에 의하면 머리에 뿔이 있고 얼굴은 용의 모습, 몸에는 비늘이, 꼬리는 숱이 많고, 네 발 달린 육지 동물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물가에 엎드려 있어 물가에서 만날 수 있는 짐승이다. 덕이 넘쳐나는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인간의 말을 하는 짐승으로 세상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으며 이 세상의 모든 귀신과 요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궁궐에서 백택은 왕자 군(君)의 흉배에 시용되고 의장 깃발에도 표현돼 있다. 북쪽의 거북이는 북쪽을 담당하는 신으로 ‘현무(玄武)’를 의미하며 거북이 지닌 상징적 의미인 장수와 복되고 길한 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등의 귀갑무늬와 얼굴 표정이 북쪽을 방위하고자하는 모습으로 잘 조각돼 있다.

금천교 남쪽하단의 용두모양 및 백택모양의 서수와 북쪽하단의 거북이모양 서수

마지막으로 더욱 관심 있게 들여다보아야 할 서수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언급하고 있는 ‘청정무사’(蜻蜓武砂)다. 이것은 남·북측면의 홍예와 홍예를 잇대어 쌓은 뒤, 벌어진 사이에 처음 놓는 석재를 말하며 흔히들 그 모양이 잠자리 두 눈 사이의 역삼각형 모습과 닮았다하여 ‘잠자리무사’라고도 한다. 이 무사 앞쪽에는 거칠고 흉하게 생긴 귀면(鬼面)을 부조하였으며 이것은 부정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금천교는 다리 위 볼록한 어도를 중국의 사신에게 내어 주기도 했다. 중종실록에는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중국 사신이 가마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고 한다. 궁궐 내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기관이자 매우 중요한 권력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 새로이 관원에 임명된 신참승지는 업무를 신속히 익혀야하는 특성상 약 2주 동안은 금천교를 넘어 외부로 나가지 못하는 엄한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험상궂은 귀면(귀신 얼굴모양)이 새겨진 청정무사와 홍예

금천교 주위에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정권 다툼으로 얼룩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창덕궁에 머물던 연산군은 반정군에 의해 쫓겨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능양군(인조)에 의해 쫓겨났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궁궐은 잠시 반란군들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 5군영 군들이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정적인 중전 민 씨를 제거해 궁궐로 난입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군인들이 맞닥뜨려 금천으로 피를 흘려보내야만 했다. 1884년 조선에 대한 강대국의 야욕을 들어낸 갑신정변 때도 다리를 열어 주어야만 했다. 이처럼 금천교는 조선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창덕궁 금천교는 속세의 근심과 걱정, 욕심을 금천에 흘려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어질고(仁政) 베푸는(宣政) 덕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왕을 만나러 들어가는 길목이자 더불어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세상살이가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삶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휴식과 여유로 작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삶의 터전 가까운 곳에서 ‘금천교’와 같은 문화재를 찾아 감상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좋은 장소다. 더불어 건축물에 담긴 사연을 알게 된다면 이는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리라. 

한 가지 팁은 언제 어디서든지 문화재 관람을 제대로 즐기려면 그 지역의 문화재를 제일 잘 아는 해설사를 찾아 설명을 귀담아 듣고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궁궐문화재의 경우 많은 기간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해설 경험이 있는 길라잡이들과 함께하면 한층 깊이 있는 감상의 시간이자 내일을 위한 기분 좋은 충전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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