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곡 김중경

오늘 아침 차를 마시면서 기생 한우(寒雨)와 얽힌 문학이야기가 느닷없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임제(林悌)는 호가 백호(白湖)이며 명종 4년(1549)에 태어나서 선조 20년(1587) 39세로 요절하였습니다. 당파 싸움이 싫어 속유들과 벗하지 않았고,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선비들은 그와 사귀기를 꺼려했습니다. 임제는 권력이나 벼슬에 매력을 느끼지 않은 위인이었기에, 그에게는 오직 낭만과 정열 그리고 문학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일찍 요절한 천재였으며 패기가 하늘을 찌르는 호남아이며, 또한 시국을 강개하는 지사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700여수의 많은 한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조 6수는 전부가 여인들과의 사랑의 노래하였습니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전국을 노닐면서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래었던 그는,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일화를 남기고 갔습니다.

 

<寒雨歌>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북쪽 하늘이 맑아서 우산 없이 길을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내리네

찬비를 맞았으니 나를 맞아주지 않는다면 찬 이불 속에서 혼자 잘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위 시조는 백호가 기녀 한우(寒雨)에게 준 「한우가(寒雨歌)」입니다. 당시 한우라는 기녀는 재색을 겸비한데다 시문에도 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났으며,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고 합니다.

‘찬비’를 맞았다’는 ‘한우(寒雨)’를‘만났다’의 비유인데,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중의법이니 ‘찬비를 맞았다’는 말은 기녀인 한우를 만났다는 풍부한 의미를 가제게 됩니다. 중세국어의 ‘얼다’는 남녀가 통정을 하다는 뜻이니 ‘얼어 잘까 하노라’는 ‘그대와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고 싶다’는 의미의 역설입니다. 중의와 역설의 수사를 이용해 오늘은 천하의 한우를 만났으니 너랑 자고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우회적으로 수작질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마주앉은 술자리에서 가득 부은 술잔을 한우는 단숨에 비웠습니다. 더운 열기를 담은 눈길이 한참 동안 임제의 얼굴에 머물다가 가야금 위에 가볍게 떨리는 손끝을 얹고 가야금의 첫줄이 울립니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

 

폭풍우가 휘몰아칩니다. 성난 파도였다가 이내 조용한 물살이더니 또다시 허공으로 부서집니다.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의 머리는 채 가시지 않은 물기로 아직 촉촉합니다. 희대의 잡놈은 짐짓 내색하나 하지 않고 태산처럼 앉아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노래 소리가 멎었습니다. 한우는 숨을 몰아쉬며 뜯고 있던 가야금을 내려놓고,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고는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하며, 창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말없이 녹던 황촉불이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다듬이소리가 야음을 타고 길게도 들려왔다가 짧게도 들려옵니다.

 

무엇 때문에 얼어 주무시렵니까? 무슨 일로 얼어 주무시렵니까?

원앙침 베개, 비취금 이불 다 있는데 왜 혼자 주무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찬비를 맞으셨으니 저와 함께 따뜻하게 주무시고 가십시오.

 

한우는 때로는 길게, 때로는 속청으로 영혼을 맑게 토해내며, 결코 야하거나 속되지 않고 외려 진실하면서도 살뜰한 인정이 노래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사랑의 화답시입니까?

보이차 속에 내재된 다양성의 힘은 이런 문학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다양한 맛과 향들이 씨줄과 날줄들로 어우러져 이루어 내는 중합성입니다.

임제와 한우의 시조에서 보여주는 농밀한 듯하되 담박한 맛과 향은 가히 세상의 모든 풀들이 엮어낼 수 있는 맛과 향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요 정수인 것입니다.

 

남곡 김중경 ▲ 서예가, 보이차 품명가 ▲이코노믹 리뷰 보이차 연재(2014년) ▲현 성차사진품보이차 대표 ▲선농단역사문화관 전통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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