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이번 주부터 수 주간 나는 ‘술’에 대한 칼럼을 쓸 생각이다. 이전에도 술이나 음식에 대해 글을 쓴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한 가지 테마를 가지고 글을 쓴 적은 없었다. 갑자기 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마음먹게 된 계기는, 나는 이제야 비로소 술에 대해 조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꽤 마셔보았고, 지금에 와선 술이, 예전만큼 맛있지가 않다.
...하여 첫 번째로 이야기할 술은, 바로 보드카다.

보드카! 러시아 국민 주류– 정도로 아마 대부분 아실 거라 생각한다. 추운 지방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마시던 술- 정도로 유래나 확산을 생각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1405년 폴란드의 문헌에 등장하여 ‘누가 보드카의 원조냐’는 논란도 있다고!

사실 나는 보드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진이나 위스키와 같이 도수가 쎈 술을 좋아하지만, 왠지 보드카는 먼저 찾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몰트 한 잔이 마시고 싶다’ 또는 ‘크리미한 흑맥주가 당긴다’는 날은 무지 잦았어도, ‘보드카 한잔 하고 싶네’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보드카가 내게 준 인상은 너무 흐리고 애매했던 것 같다. 데낄라처럼 쨍한 햇빛도, 소주 같은 구름떼도, 위스키같이 먹먹한 먹구름도 아닌- 그냥 수증기, 구름, 이런 느낌이랄까.

사실 이게 바로 보드카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무색, 무취의 술이 바로 보드카다. 최근에는 여러 향이나 맛을 가미한 보드카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보드카는 순도가 높을수록 좋은 보드카라고 하더라. 어찌 보면 소주와 매우 닮아있단 생각이 든다. ‘술맛’ 말고는 없는 술. 그래서 오히려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찾을 수 있는 술!

소주를 즐겨본 사람들은 안다. 소주야말로 정말 무색무취이기에, 매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이를테면 위스키는 언제 마셔도 그 맛이다. 발베니는 언제 마셔도 풍부하면서 부드럽고, 라프로익은 항상 섹시하다. 막걸리는... 그냥 기분이 좋다. 어쨌든 이런 술 각자 마다의 개성이 강한 데 비해, 소주는 정말 흐름을 탄다. 마시는 사람의 혀와 기분이, 술잔의 향신료가 되는 술이다. ‘어머 오늘, 소주 달아!’하는 느낌을... 아는 분들은 아실 거다.

아마도 보드카가, 러시아 사람들에겐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러시아 사람들은 보드카에 대해 좀 관대한(?) 편인 것 같다. 몇 가지 일화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러시아의 보드카 <stolichnaya>의 캠페인 광고

과거 보드카는 화폐만큼이나 귀한 가치로 여겨졌음은 물론, 심지어 러시아 초대 연방 대통령을 지냈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보드카에 취해 대외적인 상황에서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생각보다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고 한다. 취하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관대함이 뚝뚝 묻어나지 않나! 요즘 러시아 국민들은 맥주를 즐겨 마시며, 예전처럼 독주를 많이 즐기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사바사(사람 by 사람- 사람마다 다르다)’인 듯 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드카를 마셨던 적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오래된 것 같다. 내가 보드카를 선택해서 주문했다는 건, 그날 사실 술 생각이 크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당기는 술이 없는데, 그나마 만만한(?) 느낌으로 보드카를 주문하는 거다.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음료를 타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다. 토닉을 타서 마시다가 질리면, 주스를 타 마시면 되고, 또 비율을 조절해가면서 나름 ‘변화무쌍’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

원래 차갑게 마시는 이 술은, 또 내가 떠드는 사이에 얼음이 녹아 느슨한 도수가 되어 있기도 하다. 어찌 보면 술자리에서 또 하나의 등장인물과 같은 캐릭터 강한 술들과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건 보드카와 소주 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어릴 때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셔서 질린 것 같기도 하다. 라운지나 bar에 가면 맛있는 진(gin)이나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지만, 20대 초반이던 나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 때 보드카는 양 많고, 저렴하고, 키핑(keeping)도 되는 아주 만만한 술이었다. 내가 가고 싶던 어느 bar에 진입 장벽을 낮춰주었고, 내가 거기 오래 머물러 즐길 수 있도록 해준- 존재감은 작지만 묵묵했던 친구였던 거다. 보드카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쓰면 쓸수록- 소주같다.

다만 나는 어느 새로운 펍이나 라운지에 가면, 그 곳에서 파는 보드카가 뭔지 먼저 살핀다. 보드카를 시킬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떤 보드카를 파는 지를 통해 그 곳의 분위기를 대략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럽이나 라운지에서 칵테일(보드카 토닉 등)을 만들 때 쓰이는 스미노프(Smirnoff/ 러시아)와 같은 보드카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스미노프가 메뉴판에 올라와있는 펍이나 라운지는 비교적 손님의 연령층이 어리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스미노프에 드링크(토닉이나 주스 종류)를 셋트로 저렴하게 판다면, ‘아, 여기는 20대 초반 친구들이 많이 오는구나!’라고 거의 확신한다.(지금은 매우 대중적인 스미노프 보드카는 사실 굉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드카 제조법을 러시아 황실에 헌납했던 스미르노브 가문. 이후 가족 대대로 양조장을 운영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때 이들은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식 표기인 ‘smirnoff’로 가문명을 변경하였다. =Smirnov Vladimir Petrovich(1875-1934).

앱솔루트(Absolut/ 스웨덴)는 전 연령층이 즐기는 보드카 중 하나. 앱솔루트 보드카의 판매 가격을 보면, 이곳의 술값이 어떤 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소주 한 병에 3천원에 파는 곳이 있고, 7천원을 받는 곳이 있듯- 앱솔루트 보드카의 가격은 어떤 지표가 되어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록(cÎroc/ 프랑스)이나 그레이구스(Grey Goose/ 프랑스)는 스미노프나 앱솔루트에 비해 조금 더 비싸게 팔린다. 주류점에서 얼마에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에서 마시는 시록이나 그레이구스는 다른 보드카에 비해 꽤 값이 나가는 편에 속한다. 보드카 맛도 모르면서 굳이 시록이나 그레이구스를 마시는 이유? 개인적으로 그냥, 그게 더 차가워 보여서다. 얄상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병과 라벨의 디자인이, 왠지 모르게 보드카 스피릿은 저기에 더 있을 거 같아서다. 허세라면 허세다. 하지만 무색무취인 보드카이기에, 마시는 이의 기분이 더욱 중요한 향신료가 될 수밖에.

pixabay

‘생명의 물’이라는 뜻을 가진 보드카는 러시아와 폴란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랑 받는 중이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주류 매거진의 조사에서 스미노프 보드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증류주 중 3위를 차지하기도. 정신 차려 보니 마음에 훅 들어 와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것처럼, 보드카도 어느 날 내 우선순위에 떡 하니 앉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술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면, 혹은 오늘따라 뭔가 확 당기는 술이 없다면... 한마디로 ‘굳이 잔을 들어야하는데 그 장소가 소주집이 아니라면’ 보드카를 당기시길 추천한다. 무색무취의 영혼을 가진 생명의 물이 여기저기 닿아서, 술잔을 들어야 할 이유들을 찾아 숨을 불어넣어 줄지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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