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레오와 쳬이엔과 어색한 작별 인사를 하고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집을 나오자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역시 떠나는 편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인연은 모두 소중하다지만 불편한 관계를 억지로 지속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카우치 서핑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터미널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과나후아또 주에 있는 산미겔 데 아옌데로 가는 버스 표를 끊었다. 원래 출발 시간 보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다림은 멕시코에서 다반사인듯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자 했던 계획은 허사가 되어버렸고,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산미겔 데 아옌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황량하고 썰렁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하루 정도 둘러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과나후아또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과나후아또였고, 산미겔 데 아옌데는 잠시 지나쳐가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 육 일을 머물렀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여유. 물론 멕시코시티에서도, 께레따로에서도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누구도, 무엇도 신경 쓸 것이 없었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다. 게다가 산미겔 데 아옌데를 알고 나니 일주일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밤의 대성당]

갓 산미겔 데 아옌데에 도착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몰랐다. 내일모레면 떠나겠거니 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센뜨로는 황량했던 버스 터미널과는 사뭇 달랐다. 밤거리가 따스했다. 우선 숙소에 짐을 풀고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방향대로 올라가 보니 큰 대성당이 보였다. 성당 건물 곳곳에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빛을 받은 대성당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어보지만 이내 그만두고 만다. 최고의 렌즈는 역시 눈이다.

그간 여행하면서 많은 성당을 보았지만 산미겔 데 아옌데 대성당이 뿜어내는 미(美)는 시선을 잡아두는 힘이 있었다. 성당 앞에 작은 공원이 있어, 벤치에 앉아 대성당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은 금세 저만치 내달렸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을 때야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부렸다. 공원 주변엔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 많았는데, 철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사람들이 뜨거운 타코를 호호 불어가며 먹고 있었다. 공원의 빈터에선 청소년 무리가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끔씩 호응을 해주기도 했다. 공원 벤치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산미겔 데 아옌데의 밤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내일 만나게 될 산미겔 데 아옌데를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열두 시까지 정신없이 자버렸다. 더 이상 호스트가 나가야 할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빈둥거렸다. 게다가 여긴 호스트의 방이 아니라 우리의 방이다. 멕시코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 누군가의 방에서 지냈으니, 이런 자유는 처음이었다.

우리가 육 일간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 무엇을 했는지 일일이 나열한다면 무척이나 지루한 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산책을 하고, 포장마차에서 타코를 먹거나 토마토 파스타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가게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방에서 맥주를 마시다 잠에 들었다. 

[낮의 대성당]

지난 몇 년간 산책 다운 산책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런 걱정 없이 공원에서 낮잠을 잘 수 있었던가. 먹고 살 걱정을 하느라,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치열하게만 사느라, 어느새 여유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또다시 조급해지면서도 이왕 사치 부릴 거 제대로 부려보자 싶었다. 우리는 매일 다른 방향으로 걸어보았고, 매번 산미겔 데 아옌데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늘 따뜻하고 평온했다. 도시의 여유는 나의 조급함을 조금씩, 조금씩 없애주었다.

하지만 더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점점 과나후아또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이 말의 의미는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산책도 더 아쉽게만 느껴졌다. 아름다운 대성당을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낮에 보면 또 다른 미(美)를 느낄 수 있다).

떠나기 이틀 전, 광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소광장 쪽으로 내려오는데, 광장에 큰 무대가 설치되고 있었다. 벤치 위에 있던 팸플릿을 보니, 오늘부터 ‘FRINGE FESTIVAL’이 시작된단다. 오늘 무대의 시작은 여섯 시라고 하기에 궁금하기도 하여 기다리기로 했다. 여섯 시가 가까워지자 슬슬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쫄쫄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생수병을 챙겨들고 팔엔 핫핑크 색 팔찌를 차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결연한 눈빛으로 무대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무대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왔고, 간단한 인사 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열심히 춤을 따라 하는 게 아닌가.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들 티셔츠에 줌바라고 쓰인 걸 보니, 춤의 종류가 줌바인 듯했다. 신나는 음악, 경쾌한 춤. 나도 그들을 보며 간간이 동작을 따라 해보았다. 

한창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를 피하는 대신, 환호하며 계속 춤을 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가까이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잡아끌더니 대열에 합류시켰다. 졸지에 춤을 추게 되었는데, 나는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으며 엉성한 동작을 선보였다. 이때만큼은 잘 춰야겠다는 압박감, 곧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 내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았다. 진정한 여유는 모든 종류의 부담감을 내려놓고서야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춤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무섭게 내리던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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