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소포클레스는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의 단어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나후아또에 사는 한 여자와 남자의 운명적인 사랑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는 가난한 광부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결국 둘의 만남을 반대했다.

사랑이 쉽게 휘발되는 거였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앞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발코니끼리의 거리가 가까워, 두 사람은 몰래 키스를 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사랑엔 비극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사랑이 가득한 발코니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고, 결국 딸을 살해했다. 이후, 사랑하는 연인이 문제의 발코니 아래 빨간색으로 칠해진 네 번째 계단에서 키스를 하면 칠 년 동안 행복하고, 키스를 하지 않으면 십오 년 동안 불행이 온다는 전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우리는 힘겹게 ‘키스의 골목’을 찾았는데, 이미 많은 연인들이 계단에서 키스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를 촬영해 주는 사진사는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골목은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발코니가 보였는데,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놓여있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걸 잠시 잊을뻔했다.

이 골목은 애잔한 사랑의 증거이자, 처참한 존속살해 현장이다. 또 한 커플이 계단 위에서 키스를 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찾아와 자신들의 사랑이 계속되길 바라며 키스할 것이다. 괜스레 섬뜩해진 우리는 서둘러 골목을 벗어났다.

우리는 좁은 골목을 벗어나 큰길을 따라 걸었는데, 뜻밖에 장례 행렬을 마주치게 되었다. 행렬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면, 관을 멘 상여꾼들이 뒤따랐다. 관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저 마을 사람들끼리 하는 소박한 퍼레이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우리 또한 홀린 듯 그들을 쫓았다. 둘러보아도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면, 우리는 죽은 이를 축하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문득 중학생 때 수학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한 친구가 친지의 장례식으로 학교를 결석했던 날이었다. 회장에게 결석 사유를 들은 수학 선생님께서는 부모님 장례식 때 한번도 울지 않았다고, 자신은 부모님께 후회 없이 잘 해드렸고, 편히 가셨으니 오히려 웃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장례식에선 울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역시 저 선생님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죽음을 슬퍼해야만 하는 거지?”

멕시코인들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긴다. 죽음은 끝이 아닌 삶의 또 다른 이면이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기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 발코니에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여자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수년이 지나서야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장례 행렬은 산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갔고, 나와 S는 멈춰 서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나는 북, 트럼펫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