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가 비인지 눈인지 판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김연수 소설<사랑이라니, 선영아> 중에서

 

[공감신문] 아무래도 남자들끼리 만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단연 ‘여자’얘기. 이건 사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들끼리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남자 얘길 하고 있다. 아마도 수다에서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할 것이다. 

온갖 남자가 다 등장한다. 최근 알게 된 남자 얘기, 그에 대한 느낌을 설명 혹은 비교하려다 나오는 예전 남자 얘기, 그냥 사람 남자얘기, 아는 오빠 얘기… 그 이야기의 온도가 항상 뜨거운 건 아니다. 마치 재미있는 드라마를 이야기하듯 한다. ‘수다’라는 샐러드에 ‘이성 얘기’를 드레싱처럼 버무리는 것이다. 하긴- 샐러드는 드레싱 맛으로 먹는 거지.

<MAENADS MARCH ON WASHINGTON> by Arrington de Dionyso

그러나 어떨 때엔 정말 그 온도가 짙어 지기도 한다. 그건 TV드라마가 아닌, 정말 자기 이야기를 꺼낼 때다.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이 확실한- 나의 드라마. 이 드라마, 저 드라마가 아닌 한 명의 남자 주인공이 존재한다. 여자 주인공은 드라마 속을 빠져나와 친구들을 만나서, 이전 회차 줄거리를 말하고는 남자 주인공의 심리를 파악하려 든다. 그리고 마치 드라마 작가들이 회의를 하듯- 다음 주에 여자 주인공이 어떠한 행동 패턴을 보여야할 지 함께 구상한다.

특히 이런 건 연애나 썸 초반에 많이 이루어진다. ‘그’에 대한 파악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와 마음이 불확실해서다. 관계가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할지라도 두 사람의 온도가 같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여자들은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남자 역시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남자들은 여자의 행동에서 확인 받고자 하며, 여자들은 말로 확인 받는 걸 더 크게 느낀다.

이런 약간의 차이 때문에 여자들은 드라마를 빠져나와서도 계속 남자의 말에서 사랑을 찾으려 드는 것이다. 친구에게 말을 한다. 내가 생각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친구에게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와, 그 오빠가 너 정말 좋아한단 뜻 아냐?’ 혹은 썸 단계에서 ‘그건 네가 보고싶다는 거 아냐?’라고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말을 들어야만 모자란 충족감을 채울 수 있고, 그래야 다음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첫인상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의 경우, 친구들의 비난은 굉장하다. 여자 주인공이 만나보니 그 남자는 생각보다 꽤 괜찮을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그를 겪어보지 못한 시청자들은 계속 의심만 할 뿐이다. 여주인공이 아무리 그를 옹호해봤자 소용없는 일이 된다. 남자가 정말 진심으로 한 말들도 꼬아 듣고는, 제 멋대로 해석해버린다. 어쩌면 10대 때부터 여학생들의 국어점수가 더 높은 건,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일들을 쉬는 시간에 늘 연습했었기 때문은 아닐까.

=artwork by Thomas Hedger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망상’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나는 어느 순간 연애의 많은 부분들을 친구에게 털어놓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친구에게서 어느 정도 충족되지 못한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중독이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먹고도, ‘오- 뭔가 허전해!’라고 느끼며 달디 단 디저트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런 패턴이 반복되면 중독 되어진다. 이 중독은 결코 건강하지 못하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진눈깨비가 비인지 눈인지 판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복채를 내놓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만 한다.’ -김연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 중에서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을 여자 혹은 남자가 받아들이고자 하는 식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건, 단 한번도 사랑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들을 과연 얼마나 정교하게 소개할 수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그런 시공간의 느낌, 그 곳의 냄새, 두 사람의 눈빛이 오고 갈 때의 리듬- 이런 것들을 과연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허구라면 소설로 지어낼 순 있다. 이미 지나가버려서 색깔이 확실해진 일들에 대한 에세이라면 비유가 수월하다. 하지만 현재 진행중인 관계에 대해 제대로 말할 줄 아는 탁월한 인간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된다. 겨우 이정도 글 밖에 쓸 줄 모르지만 그래도 글로 밥 벌어 먹는 나조차도 그러하다. 그러기에 나 혼자만의 금고에 담아 두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몇가지 자랑할 만한 일들을 꺼내어볼 순 있다. 하지만 그 뿐이어야 한다. 내가 궁금한 건 친구가 아닌, 그에게 물어야 한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친구가 아닌, 그에게 고백하여야 한다. 말해야 한다, 그가 알게 해야 한다. 얼마전 본 영화<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 엘리오는 그날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인 올리버에게 마음을 보여주기로 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엘리오. 올리버가 ‘그걸 내가 왜 알아야하지?’라고 묻자 올리버는 이렇게, 되뇌인다. ‘Cause I wanted you to know.. Cause I wanted you to know…’, ‘그걸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해서-‘ 라고.

영화<콜미 바이 유어 네임> 중에서

이전에 ‘연애’에 대한 기법(?)들을 써 놓은 책들엔 두가지 기술이 가장 독자들을 눈길을 끌었었다. 하나는 상대방이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기법이요, 또 하나는 고백을 받아내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중요할까? ‘나’는 의뭉스럽게 말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왜 확실한 표현을 요구하는 것인가. 상처받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건 상대방을 정말 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 것쯤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왜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어?’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이야?’라고 친구가 아닌 상대방에게 물어야 한다. 정확한 대답은 상대방 마음 속에 있다. 그걸 진실로 대답해 줄지 아닐지 확률은 반반이다. 그러니 물어보자는 것이다. ‘그게 왜 궁금한데?’라는 질문이 돌아오면, 나 먼저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말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자꾸 신경이 쓰여서’라고.

사실 나도 이렇게 쿨한 척하며 글을 쓰지만, 사실 정말 쿨-하지 못하다. 친구들은 날 ‘쫄보(겁쟁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부분의 감정- 특히, 질투 같은 건 티도 잘 못낸다. 그만큼 겁이 많아서, 지금도 스스로 담대해지자고 다짐을 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나의 다짐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한마디로 ‘남자 주인공’에게 물을 말을 그에게 묻지 못하더라도 친구에게 더 이상 묻거나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아껴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사랑’그 자체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면, ‘사랑’도 날 소중하게 다뤄주지 않을까? 사랑에 대한 나의 작은 예의다.

=<Giraffe with man and woman inside> by Katherine Bradford

우린 오지랖이 너무 넓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은 시대이기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기에 애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에 살아 그렇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이벤트를, 쇼핑을, 연애를, 성관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순간의 스낵 같은 단짠단짠한 감정을 이입하여 해소한다. 나의 이야기가 ‘스낵’이 되길 반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새우깡’보다 진짜 통통한 리얼 새우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스낵이 되는 사람- 스낵을 먹는 사람, 누가 더 불쌍한 걸까. 그 두 가지 선택지에 내가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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