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프랑스의 대문호 샤를 보들레르의 세계관에서, 중요히 다뤄지는 것 중 하나는 매춘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파리의 우울>과 <악의 꽃>을 본다면, 그가 왜 ‘매춘’에 대하여 많은 묘사를 했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세계관을 통찰했던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파리의 ‘산책자(flâneur)’였다고 말한다. 그 안에 속했던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중립적인 관찰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건 보들레르가 겨우 2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탕진했던 과거가 한 몫 하지 않았을까.

<Nature morte au verre sous la lampe(등불 아래의 정물)> Pablo Picasso, 1962

사실 보들레르가 ‘악의 꽃’이라 일컫던 ‘돈’은 그에게 모든 향락을 제공하던 수단이었다. 권태로움을 앗아가 줄 수 있던 유일한 지우개. 그런 부류의 사람이던 보들레르는, 겨우 21살에 더 이상 그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저 무심하고 또 부러운 듯- 향수에 젖어 도시를 바라보는 산책자가 된 보들레르. 그는 우울한 파리, 병폐로 짙은 도시를 살폈다. 그가 보기에 ‘부르주아’들은 대부분 권태로움을 느끼며, 이 도시에서 권태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해선 ‘악의 꽃’(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태야말로 ‘악의 꽃’이 아닌 ‘악’인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는 돈 많은 부자들을 지칭하지만, 이전의 개념은 좀 달랐다. ‘bourgeoisie’(부르주아지)는 도시에 사는 ‘도시민’을 뜻했었다. 그들이 상업 등으로 활발히 부를 쌓으며, 개념이 변화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그 어떤 관계에서도 ‘부’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쇼핑을 유발시키는 거리의 수많은 쇼윈도우들이 말해준다.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관찰하고,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보들레르 역시 매춘에 대하여 긍정적인 감정을 가졌던 건 아니다. 그랬더라면 그가 그렇게 우울한 감정으로 시를 쓰진 않았으리라. 그는 매춘의 ‘수치’를 깊게 이해했다. 그러나 인간의 권태로움을 조장하는 도시에서, 매춘은 필요악이라 느낀 것이다. 그는 ‘도박’에도 그러한 감상을 가진다.

<악의 꽃>에 수록된 시 ‘돈에 팔리는 뮤즈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뮤즈는 궁궐을 바라지만, 그대 지갑 그대 궁궐처럼 텅 비었으면’이라고. 여기서 궁궐은 도대체 어떠한 궁궐인가?

 

‘그대는 날마다 저녁의 빵을 벌기 위해

성가대 아이처럼 향로 떠받들고,

믿음 가지 않는 「찬가」도 불러야 하고,’

영화<향수>중에서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생계를 위하여 거리에 나온 여인들이었다. 누구나 마음에 궁궐을 품지만, 그녀들의 궁궐은 허황된 것들이 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상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도시로 온 게 아니었다. 거기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청량리588’이라 불리던 서울 어느 향락촌과 탄생배경이 비슷하다. 한국전쟁 이후 청량리역에서 병력 수송이 이루어져서 군인들이 몰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스스로 권태롭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극심해졌다. 사람들은 게임을 하듯 하루에도 수십명의 뭇 이성과 대화할 수 있는 소개팅 데이트 어플을 깐다. 거기서 정말 맘에 드는 누군가를 만날 확률은 도박처럼 매우 낮다. 

하지만 그때처럼 ‘판돈’이 없이도 가능해졌다. 잠깐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여 수많은 스낵 정보를 접하고 SNS로 누군가의 일상을 관찰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스캔들에 격렬한 반응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권태란 ‘악’이 맞는 것이다! 권태롭지 않았다면, 그 희소한 확률에 시간과 에너지를 걸다가 우스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 있으니! 놈은 야단스런 몸짓도 큰 소리도 없지만 지구를 거뜬히 박살내고 하품 한 번으로 온 세계인들 집어삼키리. 그 놈은 바로 「권태」!- 눈에는 무심코 흘린 눈물 고인 채 담뱃대 빨아대며 단두대를 꿈꾼다. 그대는 안다,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보들레르 <악의 꽃>중에서)

이전에 부르주아지bourgeoisie들이 부르주아bourgeois가 된 지금, 그들 옆으로 온 매춘부들 역시 부르주아지가 아닌 ‘부르주아’를 향해 있다, 지향한다. 비단 그녀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녁에 먹을 ‘빵’을 벌러 나오지 않는다. 날 때부터 부르주아지였고 빵 걱정이 없었다. 부르주아가 되고자 한다. 부르주아지를 상대하던 이들과 달리, 부르주아인냥 행세한다. 비싼 것을 두르고, 고상한 척 한다. 그들이 성을 파는 곳 역시 쇼윈도우가 아니다. 돈 버는 이들이 모인 빌딩 숲 한 가운데- 멀쩡하고 드높은 건물에서 은밀하고 다양한 이름으로 판다.

<Piazza(광장)> Alberto Giacometti, 1947-8 =Guggenheim museum

돈 많은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권태로움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권태롭지 않음’은 어쩌면 모든 현대인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그들은 자신이 즐길 것이 많은 행복한 사람인 척 한다. 절대로 들켜선 안된다. 그러기에 대놓고 파는 곳이 아닌, ‘유사’한 이름의 업소- 혹은 그래 보이는 건물에서 뻔뻔하게 성을 산다. 밖에서 보면 매춘부인지 상상도 못할, 고상해 보이는 외모나 태도에 끌려 하기도 한다.

영화<코스모폴리스>중에서

사실 이거야말로 굉장히 위험하다. 정확하게 구분 짓지 않아 모호한 것들은, 늘 잠재성을 가진다. 실제 통계로 알 수 있다. 국가별 인구수 대비 성매매 종사자 비율은, 유럽에서 독일이 가장 높다. 완전 합법화인 독일의 경우, 인구 대비 0.49%다. 부분 합법화인 프랑스는 0.045%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약 27만명, 인구대비 0.538%로 독일보다 높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 통계(여성부 성매매 실태조사)는 ‘여성’만 집계한 것이며, 다른 유럽국가의 경우 여성과 남성, 트렌스젠더 등도 포함했다는 점이다(2009년 TAMPEP보고서). 아마 우리도 같은 조건으로 집계했다면, 이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을 것이다.

성매매를 합법화하자는 취지의 글이 아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자는 것이다. ‘빨강인지 파랑인지’ 구분 지어지지 않은 모호한 것들에 휩쓸릴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음란해질 거다. ‘이것은 빨강’이라 구분 짓고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보랏빛’인 줄 알았던 것들에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직장 등 사회 곳곳에서 성희롱이 잦은 것도, ‘유사한’ 보랏빛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다채로운 유사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다양한 것들에 음란하게 반응하는 거다. 이야말로 똥인지 된장이지 구분을 못하는 격이다.

우리는 보들레르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욱 우울한 사회에 살고 있다. ‘궁궐 같은 지갑’의 유무는 단지 경제적 측면을 넘어, 한 인격 자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권태로움이 더욱 기승을 부릴 내일을 맞이 하기 앞서, 오늘 밤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민들은 뭘까. 보들레르처럼 이 도시를 한 발자국, 벤야민처럼 두 발자국 뒤에서 낯설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 진짜 병폐는- 익숙해 보이는 것들 속에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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