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벽들이, 가슴에 창문이 달린 너의 벽들이 / 너의 부재를 알리는 듯 낮게낮게 신음할거야.’

(채호기 시<밤의 공중전화>중에서)

 

[공감신문] 길진 않지만 아주 짧게 몇 분이라도 매일 명상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시작했었다. 사실 스트레스 완화-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예민한 상태가 편하기 때문에 한없이 날카로움의 극치를 달리려 한다. 타고나길 예민한 성격인데 여기에 커피를 더욱 마셔 말초를 자극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작업이 끝나면 또 보란듯이 풀어지길 원했으니! 내 몸은 스위치가 아닌데, 그런 허튼 꿈을 꾸었던 거다. 내 마음을 다스리겠다고? 지나친 욕심이었다.

<Mae West Interior> by Salvador Dali 1938

내 몸, 내 마음- 둘 다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다만- 내가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원래 잘나가는 CEO들은 인재를 적절히 잘 뽑아서 그 사람의 사용처에 맞게 배치한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스려가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지금은 어떠한 모습의 ‘나’인지, 바라보는 거다.

나는 명상을 하며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게 더욱 솔직해져버렸다. 인정이 빠르다. 자존심이 상한 일이 있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을 때에- 예전 같았으면 ‘오해일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마음은 곧 그것들을 역겹다고 토해내려했다. ‘최소한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다는 건 알아 줄래?’라고 반응했다. 나는 건성으로 마음의 소리를 흘러 들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솔직하게- 다 듣는다. 그래서 오히려 덜 피곤해졌다. 상처받은 날 인정하는 것, 그게 전부다.

마음을 돌보기 시작한 나는, 곧 몸도 돌보기로 마음 먹었다. 요즘 일주일에 적어도 4번은 수영장에 간다. 겨우 30분, 더 이상은 하지 않는다. 수영을 정기적으로 다닌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 1년 정도 배웠었고, 워낙 물을 좋아해서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도 땄다. 몇 년 전에도 혼자 운동삼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수영에 명상 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일단 수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호흡에 집중하지 않거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물을 먹는다. 물 속에서의 호흡은 밖에서와 같이 그리 쉽고 당연스레 여겨질 만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명상과 똑같다. 명상은 자신의 호흡을 바라보는 것- 사실 그 뿐이다. 자신의 숨이 어디로 들어와서 어떻게 빠져나가는 지- 그 짧은 시간동안 호흡이 내 몸을 어떻게 스치는 지 알아차리는 거다. 그리고 호흡을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수영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 자유형이든, 평영이든 몸을 젓다 보면 어떤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것을 그대로, 바라본다.

=artwork by Katherine Bradford

그렇게 명상을 30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난 가끔 수영을 하다 스스로 ‘똑똑해진다’고 느낄 때가 있다. 수영을 하고 나면 피곤하지만, 오히려 작업에 능률이 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왜 일까. 그건 아마도 수영을 하는 자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영처럼 유산소의 효과도 있는 운동들은 대부분, 직립 자세로 서서 한다. 숨이 차서 피가 아무리 빨리 돈다고 할 지라도, 대부분 발끝을 치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배영이나 자유형은 눕거나 엎드려서 한다. 뇌 쪽에도 피가 찰랑찰랑 돌 수 밖에!

나는 검도나 수영, 요가와 같이 정신 수양이 동반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당연한 말을 하냐고? 이런 효과에 대해서 간과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그렇고, 더욱 그리 될 까봐. 국내에서 요가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으로 소개되며 알려졌지만, 사실 그 시작은 정신 수양이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않는다. 이전에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 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잠시 멈춰서 멍을 때릴 새도 없이, 이건 꼭 봐야 하고- 알아야 하고- 사야 하고- 그래야 ‘개-이-득’혹은 ‘손해보지 않는다’고 강요 받는다. 온전히 ‘내 것’이 없기에, 타인에게서 받는 평가에 스스로 민감해지며 거기에 스스로를 맞추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스스로가 불안하기에 남들이 열광하는 어떤 사상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그것이 당장 편하다면 난 말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그가 나에게 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설득 할 만큼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아무개 씨에게 ‘그건 좋지 않을 거예요’, 라고 몇 천 자의 글을 적을 뿐. 하지만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완전 달라진다.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다.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게끔.

그 첫번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꼭 명상이나 수영과 같은 행위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기도’도 그런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인들이 일문일답 같은 것에서 명쾌한 해답을 줄 때 감탄한다. 그러나 꼭 그것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들은 오랜 수행과 기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해왔다. 굉장한 학습이고 훈련이었을 거다.

'호흡'은 내가 세상과 가장 밀접하게 닿는 행위이다. 내 안에 세상을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것을 종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박사는 하루 2시간 명상을 한다고 한다. 그것을 하루 두 시간 바라본다는 것- 그는 매일 세상을 어떻게- 또 어디까지-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감사하고, 또 소망하는 바를 전달한다. 이 과정 자체가 정말 아름답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이 정당한지 아닌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뇌’의 입장에서 정말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를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성찰한다는 것! 그리고 뻔한 감사가 아니라 진짜 내 마음이 긍정했던 일을 돌아보고- 또 원하는 바를 인정하는 거다.

 

'이 말들 / 심장의 펄떡거림으로 생긴 말들 / 피의 흐름의 굴곡을 닮은 억양 / 몸을 압축시키며 쥐어짤 때’

채호기 시인은 시에서 그 말들을 <밤의 공중전화> 수화기에 대고 말한다고 했다.

 

‘전화기는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말들의 웅성거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 이윽고 음성녹음테이프 속에다 말들을 감금 시켜버릴 거야.’ (<밤의 공중전화>중에서)

 

물론 상대방이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이미 그 말들은 윤기를 잃어 말라비틀어져 있을 거라, 그는 썼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그런 ‘밤의 말’들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에게 걸려 온 한밤의 공중전화를, 받아야하는 것이다. 윤기를 잃지 않게, 심장의 펄떡거려 생기고- 피의 흐름을 닮은 말들이 생기를 잃기 전에 말이다. 이성과 윤리, 체면치레가 덕지덕지 묻은- 새가 들어 날아버릴 그런 ‘낮의 말’ 말고!

<Shell Seeker> by Katherine Bradford, 2014

밤의 말들이야 말로- 진짜다. 모든 것이 복원력을 가져서 피부도 좋아지고, 키도 크고, 세포도 활성화된다는 그 시간에 하는 말들에, 우리는 마음도 내어주어야 한다. 이른바 ‘싸이월드 타임’에 우리가 감성적이 되었던 것도 다 그런 신호음이었던 거다. 우리의 마음도 다른 내 몸 어느 구석구석처럼 재생력을 얻고 싶어 했다.

윤택하게, 기름이 반들반들 굳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마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정말이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해보니 그렇다. 내 마음은 내 생각보다 더욱 나약하고도 소중했다. 당신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한밤의 공중전화를 무시하지 마시길- 제안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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