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흔히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묻곤 한다. 어쩌면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성향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직업군에 몇 년 이상 종사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낀다. 특정 분야의 사람들끼리 모이면 흔히 '이 바닥'이라는 표현으로 성향을 이야기하곤 하니까.
나는 글을 쓰며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왔다. 여러 주제에 글을 쓰려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최대한 사실에 입각한- 신빙성 있는 정보를 근거로 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때문에,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대부분은 정말, '그 바닥' 사람다운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내가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글을 쓰려는데, 그 분야에 내 고등학교 동창이 종사하는 것이 생각났다. 같은 반이었던 그를 우연히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나에게 나중에 밥이나 먹자며 명함을 줬던 걸 용케 찾아낸 거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이유는, 내가 알던 그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명함 때문. 내가 아는 그는 굉장히 개구쟁이였다. 늘 화이팅이 넘치고 가만있질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솔직히 그의 성격에 비해 좀 지루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이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 쓸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라.)
'아직도 그는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명함을 받고 1년 반이 지나도록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 따로 만나 밥을 먹는 건 정말 어색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도 괜히 인사치레로 명함을 준 것 같았다. 진짜 연락할 사이라면 휴대폰 번호를 그 자리에서 서로 바로 교환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나는 명함도 없으니, 내 연락처를 받아가지도 않은 걸.
나의 호기심은, 그가 아직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을 입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성격이 변했을 수도 있겠지만 문득 너무도 궁금해져 연락을 해버렸다. 그는 뜬금없는 내 연락에 당황해서는 더욱 매너 있게 굴었다. 한마디로, 친구가 아닌 진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듯 적절한 매너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아주 어색하게도.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진짜 궁금했던 것을 질문할 수 있었다. 네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느냐-고 따질 것처럼 친근하지 않았으니까.
'너, 아직도 그 일해? 나 글 쓰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아니, 너 보고 얼마 안 있다가 그만둔 거 같아. 우리가 본 게 봄 맞지? 아마 그럴 거야.'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갑자기 그 일은 어떻게 왜, 하게 된 거냐고, 내가 아는 너는 정말 활발한 아이였는데-라면서 친구처럼 굴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그 아이에 대해 마구 아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목까지 차오른 호기심을, 그 아이가 차분하게 내치며 말했다.
'너 글 쓴다고 들었던 거 같네. 뭔가 안 어울리면서도 어울린다. 근데 궁금한 게 뭔데? 그래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대답해 줄 수 있어.'
조금 당황한 나는 그제야 원래 내가 궁금하던 것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이후에 그와 연락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문자를 주고받다가 통화를 했었는데, 마지막에 그는 활발했던-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였다.
'너랑 통화하니까 진짜 고등학교 때 같다, 야.'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나와 통화해서 고등학교 때처럼 활기차진 게 아니라 그때도 그러한 사람이었을 거다. 우린 고등학교 때 진짜 그렇게 친하지 않았었으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직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무얼 먹고 살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삶이다. 즉, 나는 어떠한 스타일-로 살 것인지 삶을 스타일링 한다. 과연 이것은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마 보편적으로 자기 삶의 모습을 한번쯤은 그려볼 여유를 가질 때가 있다.
이전에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보면, 집안 가장인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일하는 여공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가 공부를 잘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희생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이들에게 삶을 ‘스타일링’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오늘날 역시 투쟁의 연속일지라도 그녀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또 어느 오랜 과거의 ‘천부직업설’처럼 평생 직업을 고민하는 것도 좀 철 지난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홀로 투쟁하고 저 스스로 먼저 고용하는 예술가가 아닌 이상, 누가 평생 써 주리라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말한 들 그 회사가 그리 해줄 것인가. 우리는 노후에 대비하고 빠른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한 두 차례 직업을 바꿀지 모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청소년들을 만나 강의를 하곤 하는데, 그들에게 ‘넌 무얼 좋아하니?’ ‘평생 무얼하며 살고 싶니? 그걸 찾아내야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나에게도 어려운 고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넌 어떤 성향의 사람이니?’라는 질문이다.
난 어린 시절부터 좀 게으른 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관성이 없었다. 어느 날은 굉장히 학업 성취도가 높아서 열 몇 시간을 책상에 앉을 수 있었지만, 또 어떤 날은 그럴 수 없었다. 단체 생활보다 혼자서 하는 업무가 더욱 능률이 좋았다. 이렇게 성실하지 못하고 협동심이 부족하지만... 한 가지 나의 장점이라면 스스로 컨트롤이 어느 정도 된다는 점(아예 게을러지진 않는다)과- 적응력이 빠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규칙적인 수입도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난 그런 성향의 직업을 가지겠노라, 생각했다. 지금도 글을 꾸준히 쓰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개인 콘텐츠를 만드는 중인데, 나는 나의 사용 매뉴얼을 잘 아는 편이기에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들은 장래 계획에 있어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려는 경향이 크다. 당연하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한다는 전제 하에 정말 도움 될 이야기만 하려고 하실 테니. 그러나 그게 함정이 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서로에게 콩깍지가 씌어서 좋은 면만 본다. 부모님은 평생, 자식에게 콩깍지가 씌어있다. 그러니 어찌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로, 단점을 고스란히 볼 수 있을까.
비단 청소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명함이 과연 나다운가?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다운 삶을 사게 하는 직업인가? 내 인생에 어쩌면- 터닝 포인트가 될 오늘, 혹은 내일이라도 이것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의 나에게 최소한, 미안한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