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만 생각하며 살아야지”

사진 = 강현욱 사진기자

[공감신문 라메드] 영등포구 신길동의 ‘사러가 쇼핑센터’ 버스 정류장 쪽에 위치한 구두수선 전문 컨테이너. 이곳에 신발을 한 번 맡기면 다른 데 수선을 못 맡길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가진 할아버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보았다. 꽤나 큰 수제화 가게를 마주하고 있는 작은 구둣방.

그 안에서 마치 몇 번이나 만난 것처럼 에디터를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역시나, 들어오라는 눈빛과 손짓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영등포에서 홀로 구두수선집을 운영한 지 20년째. 한 번 찾아온 고객은 다른 데에 구두를 못 맡기겠다며 먼 거리에서도 할아버지를 찾아온다고 한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구둣방 할아버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구두를 배웠다. 배우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 돌아왔다. 그리고 20대 초반이었던 1960년에 처음 서울로 오게 되었다.

“당시 유명했던 수제화 회사인 ‘올림피아’에 취직했어요. 오랫동안 구두만 보고 배우고 컸으니 일하는 동안 외부에서도 스카우트 제안을 많이 받았죠. 회사생활이 지겨워질 때쯤 나와서 큰 신발 공장에서 일했어요. 일을 잘하니까 자연스럽게 거래처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가게 사장님이 저를 좋아했어요. 하루는 제게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믿고 더 열심히 일했는데, 공장 얘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결국 뒤통수를 쳤어요. 분노와 불신이 가득한 채로 거기서 바로 나왔죠.”

그 후, 모아둔 돈과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작은 공장을 지었다. 30명의 직원을 아래에 둘 정도로 잘 돌아가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남의 밑에서 일할 때는 일복이 터지는데, 혼자 공장을 운영할 때는 아닌가 봐요. 다 말아먹고 다시 명동으로 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당시 유명했던 ‘실비아 수선’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구두제작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수선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여느 구두수선집보다 사후만족도도 높았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할아버지의 착한 인성과 훌륭한 능력을 악용하는 사람이 그 후에도 계속 나타났다. 결국, 혼자 수선집을 내고 운영하기로 결심한 뒤 지금의 구두수선 컨테이너를 마련했다.

“어쩌겠어요. 다 지나간 과거인데……. 지나간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만 생각하며 살아야지.”

환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쓸쓸한 표정이 비쳤다. 하지만 곧 행복의 미소가 그려졌다.

“손녀 사진 보여드릴게요. 너무 예쁘죠? 애들 보면서 또 웃어요.”

할아버지와 1시간가량의 긴 대화를 나눴다. 다음 달에 잡지와 함께 망가진 구두를 들고 또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안 찾아오셔도 돼요. 다시 보면 반갑겠지만, 먼 길 굳이 안 오셔도 돼요. 이렇게 와준 것도 고마워요”라며 구둣방 문밖으로 나와 배웅을 해줬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고생길을 걸어왔음에도 이토록 정을 내는 구둣방 할아버지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다가올 날만 생각하면 된다”는 뼈있는 한마디가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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