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궁궐에서 살아가는 임금이나 궁인들의 은밀한 사생활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쑥스럽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갈 수 있는 세가지 조건으로 잘먹고, 잘자고, 배설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임금이나 궁궐에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예외일 수가 없다. 특히, 배설의 문제는 쉬이 드러내 놓고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지금의 화장실(化粧室) 개념은 대소변을 배설하고 손을 씻거나 화장 따위를 고칠 수 있다. 재래식인 저장식(속칭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자라난 세대들에게는 한여름 폭염에 분뇨 항아리에서 올라와 뒷간 주위를 감싸는 쾌쾌한 암모니아와 나프탈렌 냄새의 추억을 기억 속에서 쉬이 지우기가 어렵다. 임금과 궁궐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쾌변을 위한 은밀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었고 뒤처리를 하였을까?

창덕궁 희정당 귀빈실 남측 화려한 청화백자 소변기 -자료출처 : 2014 창덕궁 희정당·대조전 영역 정비 및 활용계획

궁궐에서의 배설물 뒤처리를 위하여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내전에는 측간이 없다. 이곳에서는 임금 전용 이동용 화장실 매화틀을 사용하였다. 제국 말기의 ‘김명길 상궁’에 의하면 창덕궁에서 매우틀은 선정전, 대조전의 흥복헌, 동온돌 등에 하나씩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는 창덕궁 경훈각 함실 아궁이 위쪽 좌측에 매화틀이 있다. 밖에서 자물쇠가 채운 조그만한 쪽문을 열어 보면 매화틀과 그 안에 매화(대변)와 매우(소변)를 받아내는 청동그릇이 있다. 임금이 볼일이 생기면 복이나인과 궁녀들이 황급히 4각형의 휘장을 궁궐 한쪽에 둘러치고 매화틀을 놓고 대기하였다. 일이 끝나면 비단천과 물항아리 물로 뒤처리하였고 청동그릇에 담긴 매화는 내의원으로 가져가서 왕의 건강을 검진하는데 사용하였다.

매화틀, 매화와 매우를 받아내는 청동그릇

궁궐에서 살아가는 벼슬아치, 나인, 내시, 노비 등 그 밖의 사람들은 측간(廁間)을 사용하였다. 이곳을 궁궐 사람들은 뒷간, 작은 집, 급한 데, 부정한 데라고 하였다. 민가에서는 칙간, 측간, 뒷간, 변소(便所), 똥둑간, ‘돼지우리’의 방언인 ‘통시’, 절간에서는 근심 걱정을 풀어내는 곳이라는 ‘해우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궁궐의 측간(廁間)은 여러 가지 근심을 풀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정보가 유통되는 공간, 현재의 SNS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측간에서 서로 오가는 대화를 엿들어 정보를 획득하는 일도 많았다. 단종실록에 간음죄로 감옥에 갇힌 죄수가 옥중 측간에서 둘만의 사랑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궁궐의 측간은 따로 떨어진 별채나, 본채에서는 멀리 떨어진 행각의 일부에 설치되어 있다. 멀리 떨어져 사용에 위험이 뒤따라 여럿이 모여가서 사용하였다. 뒷간의 크기는 대개 1칸에서 7칸에 달한다. <궁궐지>에 의하면 동궐에는 21군데 36간 정도의 뒷간이 있었다고 한다.

<동궐도>에 그려진 화장실에는 측간이라는 건물이 여러 곳에 있다. 그중의 하나가 3정승을 비롯한 비변사 당상관 등 주요 관리들이 정기적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곳인 ‘빈청’ 건물 뒤편에 그려져 있다.

빈청(지금의 홍보관) 뒤 ‘측간’

연암 박지원의 한문 소설 <예덕 선생전>은 불결하지만 똥 오줌을 거두어 거름으로 사용하여 돈을 벌어 살아가는 주인공 ‘예덕’ 선생 이야기다. 뒷간의 분뇨를 분뇨 항아리에 단순히 버리는 곳이 아니라 자원순환의 곳간으로 사용하는 지혜와 자신의 분수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궁궐의 분뇨를 처리하는 관아로 전연사(典涓司)가 있다. 궁궐에서 분뇨(糞尿)를 모아다 채소를 가꾸었는데 이 때 발생하는 악취로 인하여 분뇨 사용을 금하게 하였다. 대간이 대궐 내 채소농사 중지를 임금에게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창덕궁에는 시대변화에 따라 소위 말하는 재래식 화장실인 측간과 현대화된 변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진일보한 화장실이 있었다. 1890년 대 초에 화장실 용변기는 일본 무역상들에 의하여 이미 유럽에서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신선원전 수복방 쪽과 의효전, 검서청입구 영의사 느티나무 쪽에 측간이 복원되어 있다.

좌 : 신선원전 수복방 쪽 ‘측간’ / 우 : 경훈각 화장실 내부

1907년 순종황제의 즉위로 창덕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자 1908년 전등시설 난로, 서구식 실내 장식이 들어오면서 화장실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1917년 11월 대조전, 희정당 일원은 대화재로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1920년 신문기사에는 중건되는 과정에서 왕비 전하의 화장실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복원된 희정당과 융경헌, 경훈각 등에 부착형 청색 소변기와 백색 용변기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궁궐 관람에서 궁궐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은밀한 측간과 매화틀을 현재는 직접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측간은 안전상 오픈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고양시 호수공원 건너편 지하에 위치한 ‘화장실 박물관’을 관람하는 방법이다. 

관람 중 급한 용무는 돈화문 밖 매표소 옆과 낙선재 앞쪽, 후원관람 시 영화당 앞 매점의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넛지’를 활용하여 소변기 아래쪽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 아이들의 집중력을 유도해 튀는 소변을 줄여 깨끗한 화장실을 유지하게한 ‘탈러’ 교수의 지혜가 부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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