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즉조당(卽阼堂)①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즉조당은 경운궁의 여러 전각들 중에서 석어당과 함께 선조가 임진왜란이후 돌아올 때부터 있던 건물이다. 아마 경운궁에서 역사의 질곡을 가장 많이 경험한 건물일 것이다.

즉조당 (卽阼堂)

즉조당은 왕이 즉위한 건물이라는 뜻인데 누가 즉위했을까?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이후에 이곳에서 즉하였다.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남자, 광해도 경운궁西廳에서 즉위하였다 했으니 이곳에서 즉위한 걸로 보면 된다. 위에 걸려있는 편액을보니 御筆이라고 쓰여 있다.

즉조당 편액(고종의 친필)

光武 9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을 광무1년으로 보면 1906년에 지어졌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이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광무(光武) 빛나는 무력.....힘이 약한 고종이 얼마나 강한 무력을 동경했으면 연호를 광무라 했겠나?  

석어당(昔御堂)은 피비린내 나는 인조반정이후의 역사를 잘 간직한 곳이라면, 이곳 즉조당은 대한제국기를 오롯이 살아낸 한 여인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명성황후이후에 실질적 퍼스트레이디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 여인의 업적을 보자! 아관파천의 실질적 주동자. 근대교육기관인 양정을 비롯해 숙명, 진명학교를 세운 분.. 그래도 모르신다면 영친왕의 어머니하면 아시겠는가? 그래도 모른다면 우리는 국사교과서의 근대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가난 때문에 4살 때 궁궐에 들어갔다. 워낙 총명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생각시, 지밀상궁을 거쳐 명성황후의 비서실장격인 시위상궁을 한 엄상궁, 순헌황귀비를 말한다.

엄황귀비

못생긴 엄상궁으로 통한다. 명성황후와 함께 격동의 조선말을 헤쳐 나가던 엄상궁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고종의 승은을 받은 것이다. 뚱뚱한 통짜허리에 볼품없는 외모인지라 어쩌면 고종의 침소에 무작정 들이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궁궐에 난리가 났다. 중전 민씨의 눈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국가가 정상적인 상황이면 왕에게 승은을 받는 것을 장려할 일이요, 궁녀 개인에게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지만,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즉위토록 한 중전 민씨의 힘이 궁궐뿐 아니라 온 나라, 아니 세계의 정치판에도 영향을 미칠때이니 ....궁녀, 그 중에서도 자기가 그토록 믿어 몸종 부리듯 했던 엄상궁의 행동을 그대로 참아줄 리 만무했다.

형틀에 매달아 무섭게 고문하려던 찰라 수더분하고 맘씨 착한 공처가, 고종이 겨우 사정사정해서 죽음을 모면했다.

궁궐밖 10년의 세월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참혹한 시련기였을 것이다. 다시 고종의 부름으로 궁궐에 들어오게된 것은 명성황후의 사후 5일만의 일이었다.

무엇이 고종으로 하여금 상궁 엄씨를 부르게 하였는가? 사진을 보면 아무리 양장을 한껏 차려입어도 여자로서의 매력은 풍기지 않는다.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고도의 두뇌와 빠른 판단력과 친화력, 그리고 고종에게 없는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관파천, 환궁, 대한제국선포, 러일전쟁, 을사조약, 정미7조약, 고종의 퇴위, 국망등 우리나라역사의 가장 힘든 시기를 고종과 함께 헤쳐 온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힘겨운 시절을 고종의 뒤에서 때로는 위로하고, 마음을 다독거려주기도 하고, 강하게 내몰기도 하면서 주위의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시절에 고종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고종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지금부터 120년전 병신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을 주목해보자!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과 공모하여 경복궁에서 고종과 순종의 탈출을 실행했던 일이다. 거사 전 며칠 전부터 가마를 타고 궁궐출입을 자주했다고 한다. 궁궐지기들에게는 나갈때마다 몇꾸러미의 행하(일종의 수고비)를 주었다. 무료하게 궁궐지키는 군인들은 처음에 경계를 하다가 행하의 맛에 빠져들어 엄상궁의 궁궐출입에 대해 아무런 반감이 없었다.

드디어 1896년 2월11일 새벽 가마 두개가 경복궁 신무문을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엄상궁이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이 몸을 숨겼다. 뒤 가마에는 다른 궁녀가 가마문 앞에 버티고 앉았고 순종이 바짝 뒤에 숨어있었다. 신무문을 통과한 두 개의 가마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미공사관을 지나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 대신들이 인천에 정박해있던 러시아함선에서 그 전날 미리 출동시킨 수군120명의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상궁의 지모와 배짱이 아관파천을 보기 좋게 성공시킨 것이다.

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얘기하는 것이요 播遷은 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을 두고 병신년에 일어난 일이니“ 왕이 병신됐네, 병신됐네”하면서 장안의 아이들은 놀렸지만 고종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러시아공사관

공사관에서는 4개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1개의 방에서 왕과 순종이 함께 기거하고 1개의 방은 침실로,....1개는 엄상궁의 방이요, 하나는 궁녀들의 방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높디높은 구중궁궐을 떠나 좁은 러시아공사관의 생활이 엄상궁에게는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한다.

가난한 날의 행복이랄까? 1897년 10월생인 영친왕을 이곳에서 갖게 된 것이다. 1년후인 1897년2월20일 환궁을 하게 되는데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오게 된다.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뒤에 귀인으로 봉해지고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귀비로.. 황귀비로 봉해졌다.

 

영친왕

그 엄황귀비가 승하한 곳이 즉조당이다. 영친왕은 볼모성 유학으로 1907년 12월에 일본에 보내졌다.

영친왕의 태자태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방학이 되면 영친왕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감감 무소식, 화가 난 엄비는 당시 총독인 데라우치에게 무섭게 항의하였다. 갑자기 당한 데라우치는 궁궐을 나와서 마음을 다스렸기 망정이지 안 그러면 큰 사고 칠 뻔 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영친왕을 일본에 보내고 더 힘든 국망의 시기인 경술국치를 지난 이듬해인 1911년 엄상궁은 돌연히 이곳 즉조당에서 죽었다. 왜죽었을까? 아무래도 영친왕 얘기도 해야 하니 다음편에서 보자.

 

한선생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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