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한창수→한택수, 변복동 할머니→복순이, 김장한+김을한의 합성→김장한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몇 주 전 경운궁(덕수궁)의 준명당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덕혜옹주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덕혜옹주가 영화로 개봉되어서인지 몰라도 한양이야기 다른 편에 비해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관심을 주셔서 지면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고민이 생겼다. 역사 이야기를 다룰 때 사실과 허구에 대한... 어떤 범위와 경계를 영화적 상상력에 맡겨둘 것인가 하는 이야기다. 참 어려운 문제이다. 그것을 다룰 식견도 없고 재주도 없다. 단지 역사적 진실을 영화감상자들이 보다 잘 알게 될 때, 그것이 또 다른 영화감상의 재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덕혜옹주에서 독자들이 궁금해 할 몇 가지 관점에서 풀어 보고자 한다.

영화속 덕혜옹주(손예진)과 실제 덕혜옹주가 양장을 차려입은 모습(오른쪽)

먼저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덕혜옹주를 끝까지 괴롭힌 한택수의 존재여부다.

내가 보기로는 한택수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을 지낸 한창수(韓昌洙)를 표현한 것이다.

영화속 한택수(윤재문)

조선시대에 왕실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를 일제시대에 이어받은 기관이 이왕직(李王職)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사를 처리하는 행정기관 외에 왕가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나, 조선이 일본에 의해 지배력이 넘어간 마당에 조선총독부가 일본 황제 직접 관할에 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왕직(李王職)도 일본에서 황실업무를 맡는 궁내성 조직하에 편재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은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 왕가에 압력과 행정력을 행사하다보니 조선왕실의 입장을 대변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일본의 지시를 전달, 감독하는 입장이었다.

한창수는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유학 갈 무렵의 이왕직의 고급 관리 였고, 결혼할 무렵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었다. 당시 직책상 덕혜옹주에 관한 일본 유학, 결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한창수는, 덕혜를 일본에 볼모성 유학을 보내지 않으려는 조선왕실과 대립되게 된다. 이왕직(李王職)은 국내에서도 왕실의 재산, 궁궐, 왕릉 및 실록 편찬등 많은 일들을 담당하였는데,왕실의 많은 일을 해야 했던 이왕직장관으로서 오직 덕혜만 따라다니며 모든 일을 간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창수가 무리하게 일본의 입장을 강요하여 유학과 결혼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영화에서 덕혜를 괴롭히는 악역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그러면 덕혜옹주를 호종한 복순이는?

영친왕의 생전모습

덕혜옹주를 어릴 적에 맡아서 키운 유모 변복동 할머니를 모티브로 하였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름도 복동의 복자를 따서 복순이라 한 것이다.

왕실의 유모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등 사실상의 친모와 같은 존재였다. 왕비가 해야 할 엄마의 일을 대신한 것이다. 모유 생산이 가능한 젊은 여인이 하다 보니 정작 자기가 낳은 아기는 젖을 못 먹여 죽는 경우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변복동 유모가 덕혜에게 젖을 먹이려고 함께 누워있는 방에 고종이 아기를 보려고 불쑥 들어가 유모가 기겁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변복동 할머니가 일본에 까지 덕혜를 따라간 것은 아니다. 단지 덕혜가 일본에서 돌아올 때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함께 마중나간사람은 경운궁 즉조당의 유치원 친구들이었다. 모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이었다. 변복동 할머니는 친자식 이상으로 키운 아기씨 덕혜를 보는 기쁨으로 공항에 배웅을 나갔지만 , 말도 못하는 장애인 덕혜를 바라보는 상반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마치 실성한 사람과 같아 허둥대며 놀라 이를 바라본 주위의 사람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김장한의 존재는?

영화에서는 덕혜가 일본으로 끌려갈 것을 걱정한 고종이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을 장래의 배우자감으로 정했다고 나오고 일본에서도 덕혜를 늘 지켜주는 역으로 나온다. 그 김장한이 나중에 특파원이 되어 덕혜를 서울로 모셔오게 된다.

영화속 김장한(박해일)

영화속 박해일이 분한 김장한은 덕혜의 호위무사 김장한과 그의 형 김을한 서울신문 동경특파원을 합친 인물이다. 김을한은 <인간 영친왕>이라는 책에서 자기의 동생 김장한이 덕혜옹주의 혼약자로 내정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사망 당시 덕혜옹주는 여섯 살 이었다. 덕혜옹주의 약혼이 있었다고 하면 고종 생전에 일어났으므로 1912년생인 덕혜의 여섯 살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덕혜옹주의 나이도 어리거니와 조선왕조실록등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영화줄거리의 영친왕과 덕혜의 망명계획은?

먼저 영친왕의 중국 망명 계획이다. 영친왕이 고종사후에 신혼여행을 겸해서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한 일이 있다. 당시 여정으로는 일본에서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상해를 경유해야 했다.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열에서 영친왕을 납치에 대한 걱정으로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숙식을 배에서 해결했다. 대한제국의 대신 중에서 망명한 사람은 농상공부대신을 한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해 대동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영친왕보다 20살이 많은 의친왕도 1910년 망명을 시도했으나 단동에서 발각되어 미수로 끝나 아쉬움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영친왕의 망명기도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온전하지 못한 덕혜의 망명은 아예 기도조차 없었다.

 

이봉창 의사의 모습

-일왕 살해계획은 아마도 1932년 동경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천황에게 사쿠라문에서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다룬듯하다. 폭탄이 터지지 않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본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천황을 죽이려는 계획은 일본사회를 공포와 전율로 몰아넣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영화에서 의거를 실행에 옮긴 사람의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이봉창의사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이봉창의사의 사진을 보면 여유가 넘쳐난다. 일본에서 유년육군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사단장까지 역임한 영친왕이 이런 사건에 연류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덕혜옹주와는 무관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반항적이지도 않았고 더구나 항일투사도 아니다. 그저 시대를 잘못 만난 황실가의 연약한 여인이었다. 이 여인에게 왜 항일을 하지 않았냐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고양이 앞의 쥐를 아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지만 너무나 강한 일본의 세뇌교육 속에서 황실의 사람들은 무참히 스러져 갔다. 도저히 반항할 엄두를 못낸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스트레스를 내면화하면 살아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병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일본화 되어 갔고 원인도 모를 외로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내면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몸은 망가져갔고 점차 말 수를 잃어간 것이다.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한국에 돌아올 때에는 모두 실어증 환자가 아니었던가?

이것만으로도 그분들의 고통을 넉넉히 짐작 할 수 있다. 참 가슴 아픈 역사의 현실이다. 영화의 역사적 사실여부를 떠나 덕혜옹주의 삶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참 고마운 일인 것 같다.

 

한선생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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