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티바(Tea Bar) ‘알디프’에서 나눈 차 이야기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티바(Tea Bar) '알디프'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공감신문 라메드] 눅눅하고 추운 날. 바쁜 도심 속 후미진 골목 끝 한 찻집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푸근한 공기에 손끝이 찌릿하다. 손님이 들어서자 주인의 손이 한껏 바빠진다.

폴폴 소리를 내며 끓는 찻주전자가 하얀 김을 내보내고 다양한 찻잔이 두근대며 이를 기다린다. 주인이 건넨 한 장의 메뉴. ‘가을, 겨울 산행’이 테마란다. 티바(Tea Bar) 알디프의 이은빈 대표와 느긋하게 도심 속 산행을 떠났다. 단풍이 예쁘게 물든 산속, 따스한 산장에서의 휴가가 떠올랐다.

데미안에서 영감을 얻은 알디프의 알 로고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 오늘의 차, 오늘의 문장

이은빈 대표가 선보인 첫 티는 ‘스페이스 오디티’. 차를 끓이는 동안 내게 다양한 문장이 담긴 ‘오늘의 차, 오늘의 문자’ 통을 건넨다. 가을 산행이 첫 테마로 선택됐다. 이은빈 대표가 운영하는 티바(Tea Bar) 알디프는 ‘Art, Life, Tea, Dignity & Diversity, Freedom’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열린 알 모양의 심벌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은빈 알디프 대표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스스로의 알을 깨야 새로운 세상을 얻는다’는 데미안의 구절처럼 ‘작은 습관의 변화가 곧 삶의 변화로’가 이곳의 콘셉트입니다.”

우주의 맛을 표현한 스페이스 오디티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우주의 맛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서 만들었다는 스페이스 오디티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에서 따온 이름이다. 찻물이 우러나오고 심오한 보랏빛이 넘실대며 찻잔에 차오른다. 카밀러 향과 더불어 새콤달콤한 향이 특징인 이 차는 우주에서 맡았다는 포름산에틸이 파인애플 향을 이루는 물질이라는 데서 착안했다.

레몬즙을 떨어뜨리자 보랏빛 차가 핑크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 오르던 산. 이른 새벽 일어나 봤던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어둠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하늘, 처음 본 세계에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며,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에디터가 뽑은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의 한 문장처럼. 난생처음 보는 차에 오감이 반응한다.

# 얼음과 불의 밀크티

불과 얼음의 밀크티. 딱딱해진 겉면을 부셔먹는 재미가 있다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알디프가 생긴 것은 2016년 말.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던 이 대표는 중국 유학 시절, 좋아하던 차에 그녀만의 트랜디한 감각을 녹여 하나의 새로운 티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번 코스의 이름‘얼음과 불의 밀크티’는 유명 미국드라마에서 본떴다.

‘얼음과 불의 밀크티’를 만드는 과정은 보기만 해도 흥미롭다. 밀크티를 데워 우유 거품을 올린 후 설탕을 뿌리고 열을 가한다. 달콤한 달고나 향이 나면서 겉면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는데 숟가락으로 두드리면 톡하고 깨지는 소리가 난다.

한겨울 살짝 따뜻해진 공기, 발 걸음걸음 얼었던 바닥이 ‘토도독’ 깨지던 일이 생각난다. 깨진 균열 사이로 올라온 우유 거품을 조심조심 혀로 핥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 추위 속 따듯한 안식처

블렌딩 티를 포도주스와 끓여 계피와 오렌지 조각을 띄운 ‘더블 스파이크 뱅쇼’. 시나몬의 알싸한 향과 과일의 상큼함을 극대화한 따뜻한 논알콜 뱅쇼는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찾아간 따뜻한 안식처 같은 느낌을 준다. 국산 사과에 시나몬과 생강이 블렌딩된 ‘바디앤 소울’은 그대로 마시면 카페인 없는 애플시나몬티, 와인이나 포도주스에 끓이면 달달한 뱅쇼가 된다.

노래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블랜딩 티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친환경 소재로 만든 세모 모양의 티 박스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알디프에는 ‘바디앤 소울’ 외에도 다양한 블렌딩 티가 있다. ‘경화수월’ ‘나랑 갈래’ ‘서울의 달 그레이’ ‘러브 포 무드’처럼 모두 노래 제목에서 이름을 땄다. “차를 잘 몰라도 호기심을 갖고 접해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 <바디앤 소울>을 부른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만큼 순간이 느리고 풍요롭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 느긋하고 나른한 오후

달달하고 풍부한 향이 특징인 스파클 샹들리에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석 잔의 차를 마시고 나니 몸도 마음도 따듯해졌다. 해도 저만치 기울어 세상이 온통 홍차 빛이다. 알디프는 100% 예약제로 하루 4번, 2시간씩 한 번에 최대 3명이 이용할 수 있다. 덕분에 예약한 2시간만큼은 공간 전체를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즐길 수 있다.

이은빈 대표가 다음으로 준비한 메인 티는 시원하고 달곰한 향이 특징인 ‘스파클 샹들리에’ 스파클 샹들리에는 블렌딩 티 ‘샹들리에’에 홍차 시럽, 탄산수, 얼린 홍차를 곁들인 논알콜 스파클링 와인이다.

‘샹들리에’는 세계 3대 홍차 실론의 우바와 붉은 장미 꽃잎을 담았는데 화사한 꽃잎 사이로 작은 별사탕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설탕이 프로스트 된 잔을 살짝 맛본 후 차를 마셨다. 홍차 얼음이 녹을수록 기분 좋은 달콤함이 더해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장미가 만발한 5월처럼 행복해졌다.

# 하얀 눈 소복한, 만년설

‘겨울산행’ 5코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페이스 오디티, 더블 스파이스 뱅쇼, 스파클 샹들리에, 얼음과 불의 밀크티, 만년설 / 사진 = 이두용 사진기자

새하얀 겨울 산을 오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어느덧 돌아갈 시간. 겨울 산행의 마지막 코스는 ‘만년설’. 블렌딩티 ‘비포선셋’에 눈처럼 하얀 마스카르포네 치즈 크림을 올린 차다. 블렌딩 티 ‘비포 선셋’은 허니부쉬 베이스에 파파야, 딸기, 자몽크림 향을 더해 상콤달콤한 향이 특징이다.

영화 비포 선셋의 마지막 줄리델피가 떠나는 에단호크에게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 <왈츠 포 어 나이트 Walz for a night>가 이 차의 모티브. 차 위에 치즈 크림을 올리자 눈처럼 천천히 차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은근히 내려앉는 모습이 예뻐 따로 섞지 않았다. 마스카르포네 치즈의 짭짭하고 새콤한 맛이 홍차와 어울려 아련한 맛이 났다. 또 생각날 것 같다. 영화 <비포선셋>의 마지막 장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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