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상해 망명도 좌절…결혼 않고 조용한 생 마쳐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경운궁(덕수궁) 준명당 (浚眀堂)이야기를 쓰다가 덕혜옹주이야기를 쓰면서 조선황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이 칼럼은 사실 한양도성을 한바퀴 도는 것을 컨셉으로 하였는데 이것저것 쓰다 보니 조금 미루어진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꾸벅..죄송합니다.) 그런데 늦어진다고 어떠랴? 조선600년 역사의 이야기를 어찌 짧은 시간에 다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덕혜옹주보다 더 슬픈 삶을 살다간 여인의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1897년 10월 20일은 영친왕이 태어난 날이다.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한 기념비적인 날, 1897년 10월12일에서 8일 지나서였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보낸 고종과 엄귀비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고 할까? 같은 날 영국영사를 지낸 여흥 민씨(驪興 閔氏) 집안의 민영돈의 집에서도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 가문은 조선시대 8명의 왕후를 배출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영친왕과 같은 날에 태어난 민갑완, 이 아가는 앞으로 자기에게 펼쳐질 인생의 험하고 아픈 일들을 짐작이나 했을까?

민갑완과 영친왕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1907년, 그해 봄, 경운궁에는 영친왕의 배필을 맞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영친왕의 친모 엄귀비가 영친왕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조선의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간택령을 내린 것이다. 조선왕가에서 왕세자의 배필을 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간택의 첫 단계는 전국에 결혼을 금한다는 금혼령이다. 왕은 나라의 모든 처녀를 배필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딸을 둔 집안에서는 처녀의 사주단자를 왕실에 보낸다. 그렇다고 전국 모든 처녀의 사주단자가 오는 것은 아니다. 주로 왕비가 되고 싶어 하는 명문가 규수의 사주단자가 온다. 그 중에서 3간택의 절차, 즉 3번의 심사를 통해 왕세자의 배필을 최종 낙점하는 것이다.

사주단자

 

엄격한 심사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영친왕과 같은 날 태어난 이쁘고 똑똑한 아가씨, 민갑완이 배필로 정해졌다. 왕실의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정혼을 약속하는 信物인 가락지를 받았다. 이제 궁궐에서 가례(嘉禮)일을 받아 예식만 치러지면 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으로 등극할 영친왕의 비, 조선의 국모가 되는 것이다. 1907년 12월 영친왕이 일본에 유학을 떠났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갑완도 이제 20살의 과년한 여인이 되었다.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차에 궁궐에서 일단의 상궁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택일 때문에 왔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혼약을 파기한다는... 집안이 난리가 났다. 이 일의 충격으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6개월후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민갑완

 

영친왕이 일본 황족인 마사꼬, 방자와의 결혼이 확정된 후에, 예정된 혼약자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일본의 강요에 파혼된 것이다. 왕실 법도상 한 번 왕비로 간택된 여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했다. 일본은 겁탈후에 강제로 일인과 결혼할 계획까지도 세웠다고 한다. 이 일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 6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인데... 가락지는 마음의 정표로 간직하겠다는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궁녀들의 강요에 의해 약혼반지는 빼앗겼다. 조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돌아오겠다는 각서와 재산을 공탁하고 해외로 망명을 감행하였다. 남동생과 중국 상해로 가서 길고 긴 고난의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하고자 의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았으나 그것도 중국 일본영사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일본의 감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독서와 뜨개질뿐이었다.

평상복의 민갑완(평소에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규식 선생의 독립운동을 권유 받았으나 “나 혼자 조용히 살면 세상이 편안할 것”이라고 하면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의 청혼도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민갑완과 조카 병순

국내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된 후인 1946년의 일이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녀를 반겨줄 사람도, 수중에는 아무런 재물도 없었다. 주위에서 1963년 조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의 만남을 주선하였으나 이마저도 거부하였다.

1968년 71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다. 평생 의지하였던 남동생이 죽자 곡기를 끊어 삶을 마감한 것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정혼녀였던 그녀는 유언으로 ‘나는 처녀인 만큼 절대 남의 집에서 죽게 하지 말고 수의는 옛날 선비처럼 남복을 입혀 주세요’ 라고 했다. 아마 황실의 권위와 가문의 영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바람이 아니었을까?

 

예전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국 여성의 지조가 얼마나 강한지를 일본인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비운을 복수하려고 한 겁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백년한』이란 책으로 전해온다. 백년 동안의 한이라니...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을 헤아리려면 백년이 아니라 천년도 모자랄 것이다. 몇십년만 먼저 태어났으면 어쩌면 조선의 국모가 되어 만백성의 숭모의 대상이 되었을 여인이다.

조선 황실가의 여인은 아니지만 덕혜옹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요즈음 민갑완의 존재도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영친왕과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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