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의주 몽진후 돌아와 기거하기도…고종도 아껴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경운궁의 건물중에서 가장 특색있는 건물은?

돌로 지은 석조전도 있지만 전통 궁궐 양식으로 지은 건물 중에서는 석어당(昔御堂)이 다른 건물들과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단청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의 모습처럼 보여 친근하기도 하고 2층 건물로 되어 눈에 도드라진다. 아마도 키는 멀대처럼 크지만 잘 먹지 못해서 핏기하나 없는 남자 중학생의 모습이랄까?

석어당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난 후 돌아와서 기거한 건물이니...

그래서 건물 이름도 옛 석昔, 임금어御, 석어당이다. 선조는 이 석어당에 머물면서 임난 이후에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정을 바로 챙기고자하였다.

그래서 일까? 고종도 이 건물을 가장 사랑하였다. 이 건물의 서까래하나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데... 아마 본인도 선조를 이어받아 국정의 난맥을 이곳에서 풀려는 의지가 강하게 있었던 것 같다.

고종의 근심과 한숨이 이 건물 대청에서 묻어나는 듯하다.

 

그런데 이 건물에는 또 다른 여인의 한이 서려있다.

인목대비... 누군지 아시겠는가? 선조의 계비요, 선조가 낳은 늦둥이 영창대군의 어머니이다.

조선 왕실의 장성한 왕자들은 부왕의 계비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이성계의 계비(계비는 왕비가 죽은후 간택에 의해 새롭게 맞은 왕비를말한다. 후궁과는 비교불가) 신덕왕후 강씨와 마찰을 빚은 태종, 방원과도 마찬가지였다.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이 항상 벌어진 것이다.

장성한 왕자는 왕이 되려 할 것이고, 계비(繼妃)는 늦게 얻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밀다보니 어쩔 수 없는 권력싸움이 벌어진다.

그런데 항상 부왕은 계비의 편을 들어준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왕자보다도 젊은 계비의 소생에게서 난 손자와 같은 자식을 더 사랑할테지.....

인목대비 친필족자

임진왜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많았던 선조. 그러나 선조가 급작스럽게 죽었다.

3살짜리 영창대군을 왕으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광해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왕이 된 후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이고 인목대비를 이곳 석어당에 유폐시킨다.

 

계축일기

석어당에 유폐된 인목대비의 참상을 나인들이 보고 기록한 글이 3대 궁중문학의 하나인 계축일기(癸丑日記)이다.

이 책에 보면 광해의 비정한 행위를 한양의 남산, 목멱산의 모든 소나무를 깎아 붓으로 만들어 글을 써도 모자란다고 하였다. 광해군의 왕권도 인조 반정으로 오래 가지 못하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명나라에 사대(事大)의 예를 못한다는 명분에 밀려 능양군.... 인조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반군에 의해 쫓긴 광해군은 창덕궁 담을 넘어 안국선의 집에 피해 있다가 반군에게 잡혀 이 석어당 앞뜰에서 자신보다 10살 어린 계모 인목대비에게 석고대죄(席藁待罪)해야 했다. 독이 오른 인목대비는 광해에게 갖은 욕을 퍼붓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한다. 인목대비는 30여 가지의 죄를 물어 왕을 페위 시키고 강화도로 유배시켰다.

 

광해는 역모로 몰아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키고 온돌방에 불을 때서 증살(蒸殺)로 자기의 이복(異腹) 동생을 죽였는데 이제는 처지가 바뀌었다.

그는 세자와 세자빈과 함께 강화도의 동서로 나뉘어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 공주로, 제주도로 장소를 바꿔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재위 15년보다 더 길은 19년의 세월을 귀양지에서 보냈다. 제주도에서는 유배지를 지키는 영감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며 남은 세월을 속절없이 이어갔다.

영창대군묘

함께 유배를 떠났던 세자와 세자빈의 얘기는 권력의 부질없는 속성 앞에 가슴이 아리어온다.

가시 돋힌 탱자나무울타리에 감금 생활을 하던 세자와 세자빈은 탈출을 결심한다. 구들장을 뜯고 몰래 땅굴을 파나갔던 것이다. 눈치 채지 못하도록 다리미와 가위를 이용해 조금씩 땅을 파서 앞마당에 흙을 뿌리면서.....

 

이들이 탈출 하였겠는가?

마침내 집밖으로 나오기는 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방향이 어딘지 모르겠는 것이다.

광해군묘

두리번거리다가 지키는 병졸에게 붙잡혔다.

이 광경을 나무위에 올라가서 지켜보던 세자빈은 세자가 붙잡히는 것을 보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목을 매 자결하였다.

세자는 자진하라는 인조의 명을 받고 결국 사약을 받는다.

 

외교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지혜로운 외교술을 구사한 광해군!

인조반정 이후의 역사는 노론(老論)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노론이 기득권(旣得權)이 되고 그들이 운영하는 나라는 결국 일제에 의해 망해버렸다.....

일제에 의해 작위를 받은 수작자 76명중 80%인 57명이 노론의 후손이라고 한다.

참으로 통탄하지 아니라 수 없다.

광해군 어진

노론의 대다수가 친일파가 되고.....

경술국치를 맞이하는 요즈음,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서 여전히 눈치를 보아야하는 반도의 나라 대한민국...

중도외교를 실현하려다 기존 보수층에게 실각당해 기어코 조선시대 폭군으로 기록되고만 비운의 왕 광해군.

광해군이 오늘 현실을 보면 어떤 장탄식을 할 것인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놓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의 현실과 시간을 달리한 데쟈뷰가 아닌가?

석어당 (昔御堂)앞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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