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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정환선 칼럼] 다산 정약용의 창덕궁 벼슬살이 따라가 보기

[공감신문] 2004년부터 유네스코의 이념 가치에 맞는 세계사적 사건이나 위인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관련 기념일’로 선정하여 지구촌이 함께 그를 기리게 된다. 유네스코는 조선의 실학자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삶과 업적을 인정하여 2012년 다산 탄신 250주년을 ‘유네스코 관련 기념일’로 선정하였다.

2018.12 창덕궁 낙선재의 함박눈과 농익은 감의 어울림 / 궁궐 길라잡이 이한복

다산은 1762(영조38)년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15세에 결혼하여 서울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살았다. 1783년 22세에 대과와 달리 바로 벼슬이 주어지지 않는 명예직이자 가문의 영광이라는 소과의 진사과에 입격한다. 27세에는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인 ‘반제’에 합격한 후 희정당에서 정조를 직접 뵙는다.

‘성정각’은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성균관 학생 다산이 반제에 수석 합격한 답안의 시를 낭송하고 정조로부터 칭찬과 선물을 받기도 한 곳이다. 이미 여러 차례 선물을 받아 이제는 줄 것이 없자 ‘중희당’으로 불러들여 커다란 사발에 ‘계성주’를 가득 부어 몹시 취하여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마시게 하여 빈청에서 쉬어야만 하는 일도 있었다. 정조의 무취불귀(無醉不歸)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소신은 다산에게는 힘든 일이기도 하였다.

‘춘당대’는 다산이 24세에 임금이 직접 창경궁 쪽의 집춘문을 통해 환궁하여 치러진 알성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곳이다. 다산은 반제에서 여러번 수석을 차지하여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대과 과거시험에서는 네 차례나 낙방하였다.

정조와 초계문신 다산의 발자취가 있는 눈꽃 속의 ‘성정각’과 자시문 / 촬영 : 궁궐길라잡이 이한복

다산의 창덕궁 벼슬살이 기간은 약 7년으로 대간, 승지, 참의, 암행어사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1789년(정조13년) 28세 식년시 문과에 장원 없는 차석으로 급제하여 아버지가 참봉 벼슬살이를 하였던 서삼릉의 장경 왕후의 릉을 관리하는 7품의 ‘희릉’ 직장으로 시작한다.

더불어 규장각에서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선발한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희정당’에서 ‘대학’을 강의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임금의 구술을 문장으로 만드는 직책인 승정원일기를 정리하는 임시관직 ‘가주서’를 하였다. 병조참의로 정조의 화성 능행 길에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수원의 화성 축조에도 기여 하였다.

다산이 주로 근무했던 전각 가운데 규장각(이문원), 검서청, 홍문관(옥당), 예문관, 내병조, 정청, 성정각 등은 현존하고 있지만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은 동 궐내 각사에 위치하여 복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산의 창덕궁 벼슬살이를 힘들게 하였던 것은 서학과 관련지은 정적들의 무고와 모함, 술과 활쏘기였을 것이다. 주군 정조 임금께서 즐겨 하시는 술, 담배, 활쏘기 등을 다산은 즐겨 하지 않았으니 신하로서는 그저 민망스러웠다.

희정당과 복구의 손길을 기다리는 동 궐내 각사 / 촬영 : 궁궐 길라잡이 장경상

정조는 가끔 ‘춘당대’에 납시어 신하들에게 활을 10순(1순은 5발)을 쏘도록 하였다. 다산은 먼 거리를 날아가도 정확도가 높은 특수화살인 후전(帿箭)을 과녁 밖으로 날려버려 북영(현재 신선원전 영역)에 들어가 하루 20순을 쏘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손이 저리도록 연습을 하였다.

1795년 3월 후원의 부용지 일원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꽃을 감상하고 낚시를 하는 상화조어연이라는 잔치가 열렸다. 부용정과 부용지 일원에서는 정조가 초청한 신하들과 함께 낚시와 부용지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짓기 행사를 벌이곤 했다. 다산은 고기를 못 잡은 일로 벌주를 마셔야 했고, 시 짓기로 연못 가운데 조그만 섬으로 잠시 귀양을 갔다 풀려나기도 하였다. 다산은 정조가 후원의 농산정으로 신하들을 불러서 음식을 베풀고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인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하며 시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다산 사랑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겨울 한밤중에 임금의 명으로 ‘상의원’에서 논어를 읽고 있었던 다산에게 정조는 규장각 서리에게 다음날 강의할 내용을 미리 주도록 배려하였다. 다산은 이를 거절하고 밤새 전편(全篇)을 읽고 경연에 나아가 강을 하면서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는 바다 건너온 매우 귀하고 잘 익은 감귤과 진귀한 음식을 내려준 음식을 내려주었다.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임무를 맡지 않고 입시를 거부하여 해미현으로 유배를 떠나 귀양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다산의 창덕궁 출퇴근 길목 금천교와 진선문의 겨울 풍경 / 촬영: 궁궐길라잡이 장경상

31세에는 임금과 정치와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에 드나들기도 하면서 임금을 보필하는 요직 옥당(홍문관)에 들어가게 된다. 옥당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5대조 정시윤에서 12대 조부까지 8대가 옥당집이라는 호칭을 듣는 집안이었지만 ‘남인’ 집안인 다산의 경우는 더욱 어려웠다. 이때도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과 배려로 홍문관 학사 벼슬인 수찬에 제수되었다. 33세에는 홍문관(옥당)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어명으로 경기도 북부지방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다.

이 때 경기 관찰사 서용보의 비행을 고발한 것이 악연이 되어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하여야 했던 계기가 된다. 1797년 정적들의 모함으로 죄가 없다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그를 보호하고자 문무관의 실제적인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전랑의 천거 절차를 무시하고 다산을 곡산 도호부사로 직접 특별 명령으로 제수하자 7월에 희정당에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임지로 갔다.

다산의 벼슬살이 동안 신뢰와 사랑을 듬쁙 실어 주었던 주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산에게 커다란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서학(천주학)은 벼슬살이 동안 정적들의 모함을 위한 발목 잡이 소재가 되었고 이 일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38살 형조참의 때 “벼슬살이 동안 두루 여러 직책을 거치는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아야 했는데 임금님 마음을 괴롭혀 드렸다”는 안타까운 사직상소는 창덕궁의 벼슬살이가 그리 만만치는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해 창덕궁 대궐문을 나서 명례방(지금의 명동 부근) ‘죽란사’로 돌아와 벼슬살이를 끝내야 하였다.

39살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에 “여(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유(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라는 뜻의 “여유당(與猶堂)” 편액을 걸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항상 따르니 말이나 행동, 몸가짐을 삼가 신중하게 처신하여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리라. 헌종 2년 75세로 자택에서 서거했던 큰 스승 다산의 창덕궁 벼슬살이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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