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정조의 화성행차(華城行次)를 따라서②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화성 축조 공사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인 1775년 을미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인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구갑(舊甲)이기도 하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과 화성에 행차하는 크고 놀랄 일을 계획한다. 장장 왕복 2백리가 넘는 길을 행차하는 것은 일찍이 조선왕조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을 통해 정조 개인에게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려는 효심에서 출발하였지만 자신의 재위 20년의 위업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개인에게는 효의 발현이며 정치적 역량을 모아 충을 결집시켜 국정을 안정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드라마를 연출하려 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으니 <원행을묘 정리의궤>이다.

원행을묘 정리의궤

을묘년에 현륭원을 행차하였는데 이 행사를 주관한 정리소에서 특수제작한 활자인 정리자로 만든 의궤라는 뜻이다. 이 의궤는 화성건설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편찬된 의궤의 백미로 꼽힌다. 새로 제작한 금속활자(정리자)를 사용하여 100여부를 만들었는데 서울대학교규장각과 국립도서관 등 여러 곳에 수십부가 전한다. 의궤의 내용 중 63쪽에 달하는 반차도는 왕의 행차행렬을 순서대로 그린 그림이다.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선 제일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다. 등장인물만 자그만치 1,779명, 행사에 동원된 말도 799마리에 이른다. 실지로 동원된 인원은 6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반차도

경기도관찰사 서유방이 행차의 선두를 지키고 그 뒤에 행차의 총괄 책임자인 총리대신 채재공이 나섰다. 중간 중간에 왕의 갑옷을 실은 갑마와 국왕의 직인을 실은 인마가 등장한다. 일단의 군인들과 악대가 나타나고 병조판서 심환지가 나타나면 목이 빠져라 기다린 국왕의 가마인 정가교가 나타난다.반차도에 나타난 행차를 알아보자! 조선시대 왕의 행차는 군사훈련의 성격을 띤다. 행렬은 완전 무장한 많은 군인의 호위 하에 움직인다. 350명의 대규모 취타부대를 중간 중간 배치시켜 행렬의 보조를 일정하게 유지시키고, 바람에 펄럭이는 갖가지 깃발은 자유로움 속에서 장엄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왕의 행차를 보기위해 모여든 백성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정가교

하지만 왕은 이 가마에 타지 않았다. 뒤이어 음식을 실은 수라가자가 나타난다. 사이사이 군대의 행렬이 나타나고 혜경궁홍씨의 가마와 정조의 좌마가 연이어 나타난다.

혜경궁홍씨 가마

그런데 정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존엄한 왕의 용안은 보이지 않는다. 잘 치장된 말이 왕이 타고 있음을 알뿐이다. 여기까지가 약 1km에 이르는 행차 행렬 중 겨우 절반에 불과하다. 끝없는 행렬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왕은 가까이 보기위해 모여드는 군중들을 막지 않았다. 효와 충이 어우러지는 장엄한 축제의 장에서 백성들과 함께 맘껏 나누고 싶은 것이었다.

 

8일간의 행차

또 다른 의문하나, 이 행차는 어떤 길로 간 것일까? 음력2월 9일에 출발 12일에 현륭원참배, 13일 화성행궁에서 회갑연, 16일에 창덕궁에 도착한 <8일간의 행차>를 알아보자.

창덕궁 돈화문을 나선행렬은 파자전 돌다리(단성사)를 건너 종루앞 보신각에서 길을 틀어 광통교를 건너 송현(한국은행)을 지나 숭례문에 이른다. 도성을 나와 청파교(숙명여대앞)를 지나 용산방, 이윽고 노량나루(한강철교와 인도교 사이) 배다리에 이른 것이다.

배다리

배다리의 축조는 정약용이 담당하였다. 60여척의 배를 장목으로 엮고 그 위에 횡판을 깔고 잔디까지 깔았다. 가장자리에는 말뚝을 세워 난간을 둘르고 홍살문까지 세웠으니 튼튼한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지금의 상도터널위인 용양봉 조정에 이르러 오반을 들고 장승백이, 번대방평(대방동), 시흥현 문성동 앞길을 지나 시흥행궁(현 시흥 5동 동사무소로 추정)에 도착해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둘째 날은 대박산 앞길, 염불교(안양유원지입구)를 지나 원동천(성라자로원입구), 사근참행궁(일명 골사그네)에서 점심을 들었다. 대략 지금의 시흥대로와 안양시 만안로,1번국도에 해당되는 길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옷을 챙겨 입고 또다시 출발, 지지대고개라 불리는 미륵현을 지나 괴목정 다리를 통과, 노송지대를 지나 장안문에서 5km 떨어진 진목정(만석거공원 부근)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먼저 가 있던 채재공과 군악대, 기생들의 영접을 받았다. 장안문을 통과하여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가 혜경궁홍씨는 장락당으로 모셔졌고 왕은 유여택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이후에 현륭원참배, 화성행궁에서 성대한 회갑연을 베풀었다. 이러한 행사를 모두 마치고 2월 15일 화성을 떠나 돌아오게 된 것이다.

화성행궁

 

한선생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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