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필요

[공감신문=박범준 칼럼니스트] 김모씨(55세)와 박모씨(56세)는 은행지점장과 중소기업 사장으로 주말이면 바다낚시를 즐기는 친구사이다. 두 사람은 어느 주말 강원도의 한 어촌마을을 찾아가서 바다낚시를 즐기게 되었다. 바다낚시를 끝내고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두 사람은 마을의 풍광에 흠뻑 빠져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때려 치우고 여기서 살까?”라고 하자, 다른 한 사람이 “그럴까?”라고 말을 받는다.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곳은 더 이상 찾아가지 않고, 주말만 되면 강원도 어촌마을을 다녀가게 되었다. 나이가 많으신 마을 어른들에게 술 한 잔 받아 주기도 하고, 바다낚시를 해서 잡은 생선으로 매운탕도 해먹으면서 마을 주민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수산물 등등에 대하여 파악하고, 마을 주민들의 주 소득원이 무엇인지 파악하였다.

서울에 돌아와서 중소기업 사장은 중소기업을 정리하는 한편 강원도 어촌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수산물의 판로에 대하여 여기저기 확인을 하였고, 지점장은 지점장 나름 일종의 산지 직거래 가능성을 여기저기 확인하였다.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은 두 사람은 마을의 이장을 비롯한 마을 지도자들과 주말마다 마을을 찾아가 낚시도 즐기고, 귀농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드디어 마을을 드나든지 어느 덧 8개월여 만에 두 사람은 지점장과 중소기업을 정리하고, 강원도 어촌마을로 귀농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귀농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던 마을 주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두 사람의 귀농인들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점진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관행적으로 1차 농산물, 수산물, 임산물을 판매하였는데,

귀농인들이 “반찬으로 만들어 판매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을주민들이 “팔 데가 있어야 말이지?”라고 하니까,

귀농인들 “원료가 싱싱하고, 맛이 좋은 데 뭐가 걱정이냐. 우리가 팔겠다”

전직 지점장과 중소기업 사장은 수도권에 있는 네트워크, 즉 인맥을 동원하여 좋은 가격에 반찬들을 모두 팔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수도권의 친구들이 두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갖고 하나 둘 마을을 찾아오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마을에 정착 한지 1년여가 경과하자, 마을 주민들의 소득은 놀라보게 늘어났고, 마을은 급속도로 활력을 찾게 되었다. 고추는 고추장으로, 각종 산나물은 반찬으로, 무, 배추는 김치로 둔갑하여 과거에 비하여 몇 곱절 남는 가격으로 판매하게 되었고, 마을 회의도 잘되고, 단합도 잘 되고 있다. 살기좋은 농촌마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두 귀농인은 하늘에서 준 복덩어리이자 선물로서 바로 행운 그 자체인 것이다.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를 모색하는 이모씨(48세)가 있다. TV에서 귀농하여 억대 소득을 일군 사례를 접하고, 귀농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인터넷을 통하여, 정부의 귀농 귀촌 지원정책과 제도에 대하여 알아보기도 하고, 귀농귀촌 지원센터를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귀농귀촌학교에 등록하여 관심이 있는 품목에 대하여 영농기술도 익히고, 살 집이랑 먹고 살 방법에 대하여 나름 열심히 준비한다.

OO군 귀농지원센터의 도움으로 마을 이장님을 소개 받고,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마을에 땅도 장만하고, 집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농촌에서 못살겠다고 모두 떠나는 마당에 젊은 사람(48세면 농촌에서는 무지하게 젊은 편임)이 농촌에 살겠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새로 지은 집의 준공이 떨어지고 나니, 귀농인은 측량기사를 불러 측량을 하고 집 둘레에 펜스를 친다. 근데 공교롭게도 펜스를 치고나자, 마을 주민들이 다니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경운기, 트랙터 등 농기계며 트럭이 다니기가 어려워지면서,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마을 주민들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막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고,

귀농인 이모씨는 “내 땅에 내가 팬스를 쳤는데 뭐가 잘못입니까?”라고 하고,

마을 주민들은 “당신 오기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귀농인 이모씨는 “법대로 하십시오. 아니면 조만큼 마을에서 사던가?”

마을 주민들은 어이가 없어 하면서 “그래 얼마면 팔겠는가?”

귀농인 이모씨 “평당 50만원은 줘야 합니다.”

마을 주민들 “ 뭐라고? 평당 3만원에 사놓고 평당 50만원을 달라고?”

귀농인 이모씨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고, 암튼 50만원이하로는 안 팝니다.”

귀농인 이씨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에서는 연일 마을회의가 이루어진다. 이모씨를 소개시킨 군청 귀농귀촌센터에 찾아가 항의도 해보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를 못한다.

결국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귀농인 이모씨에 대하여 일체의 협조를 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마을기금을 통해 불편하지만 통행길을 확보하게 된다.

귀농인 이모씨는 마을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어느누구도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농사와 관련하여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군청 농업기술센터에 가서 불어볼려고 해도, 다들 슬금슬금 피하기 바쁘다.

결국 귀농인 이모씨는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 서울로 다시 가버렸다. 마을에는 어두운 상처만 짙게 드리우고 나서.........

 

양지바른 언덕빼기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새로 지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은퇴한 부부가 살러왔다. 마을 주민들과 왕래는 없고,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눈 인사만 주고 받는다.

마을에 정착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나자, 주말이면 서울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울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언덕빼기 집은 음악소리에 시끌벅쩍해 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고성방가로 밤 늦게까지 떠들썩하다.

평상시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한창 농번기가 도래하면 상황은 급변한다. 일 손은 없고, 땡볕에 힘은 들고 죽어라고 일하고 있는데, 언덕빼기 집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하며, 음악소리하며, 일광욕을 한다고 거의 벌거벗고 있다시피하며 누워있고........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언덕빼기 집을 찾아가서 항의를 한다. “한참 바쁜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음악소리며 웃음소리며, 자제해주면 좋겠소”

“우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피해를 줬단 말입니까? 내 집에서 음악도 못 듣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게.....”

“더 이상 볼일 없으면 나가 주시오”

은퇴이후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언덕빼기에 아담한 집을 짓고 사는 귀촌인 부부와 마을사람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농촌문화, 도시문화

문화란?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고, 살아온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농촌문화는 삶 자체가 주민들 간에 서로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구조로서, 부족한 일손을 서로 메꿔야 하고, 대개의 경우 혈연으로 맺어진 가구가 다수 있다. 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따라 단오제, 정월대보름행사, 동제 등등 각종 행사가 치러진다.

집안 어르신의 생일이나 제사음식은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눠먹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마을 사람 모두가 십시일반 거드는 공동체문화가 일반화되어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 우선하여 마을전체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만약 개인의 이해와 마을 주민전체의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면 마을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통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고, 당사자와 가까운 마을주민들이 갈등중재자로 나서서 마을 주민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이 되도록 한다.

농촌에서 경제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마을주민과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상호 부족한 노동력을 울력으로 교환하고, 각종농기구를 공동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농사와 관련한 각종 기술 정보 자료를 공유하며, 값싸고 질 좋은 농자재를 공동 구매하여 비용을 줄이기도 한다. 홍수해, 가뭄 등 각종 자연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않되고, 마을 주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농촌에서 개인의 삶의 질이 점진적으로 나아지려면 마을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각종 마을단위 사업(문화 마을, 체험 마을, 정보화 마을)과 마을 가꾸기, 보건의료 및 복지 사업 등이 마을단위로 이루어 진다.

이와같이 농촌에서의 경제적 삶, 사회 문화적 삶이 마을을 기본단위로 하는 공동체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문화는 아파트문화로 대별되는데, 설혹 한 곳에서 몇 년을 살아도 바로 이웃집 남자의 직업이 뭔지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음식을 나눠 먹는 경우도 드물고,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마땅히 의논할 상대를 이웃에서 찾기란 매우 힘들다. 대개의 경우 집안 어른이나 직장의 상사, 혹은 동료 등 개인적으로 형성한 인간관계를 활용한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주거공간의 폐쇄성 뿐만아니라 직장생활 또한 대단히 폐쇄적이다. 개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개개인의 성과에 따라 급여와 승진이 이루어진다. 매 순간 최종적으로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개인이 책임을 진다. 여행을 갈때도, 외식을 할 때도 개인 혹은 가족이 중심이 되어 판단하고 결정한다.

농촌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을 겪어보고 나면 이구동성으로 ‘깍쟁이’라고 부른다. 이때 ‘깍쟁이’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결코 적은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자세와 태도를 뜻한다.

도시에서의 삶을 통해 습관화 된 도시 문화는 한마디로 개인주의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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