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생각과 실천, 지식에 대한 갈구가 노마디즘의 자질

조창완 중국전문 컨설턴트

[조창완 중국전문 컨설턴트]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란 말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1968년 출간한 저서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에서 처음 언급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며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으로 차 있다. 이런 삶에 대한 찬가”라고 정의되는 들뢰즈의 철학(서동욱 서강대 철학자의 ‘네이버 캐스트’ 중에서)에서 이 말이 나왔지만 노마디즘을 더 체계화한 것은 역시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아탈리다.

1943년생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자크 아탈리는 2003년 첫 출간된 그의 저서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노마디즘을 중심 사상으로 공포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하이퍼 노마드까지, 유목민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아탈리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6천년의 정착민 역사가 아닌 6백만년 노마드 역사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불, 언어, 민주주의, 시장 등 끊임없는 질주와 생성을 통해 얻어낸 노마드의 발명품에 비하면 정착민의 것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인구의 1/6이 이동을 하며 살고 있고 그들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넘어 새 것을 창조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국경을 허물어지고 마지막 정착민 제국은 시장, 민주주의, 이슬람이란 새로운 노마드 세력 앞에서 마지막 몸부림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럼 우리 민족에게 노마디즘적 자질은 있는 것일까. 필자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전자부터 그런 자질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노마드들도 많이 알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내가 꼽은 가장 위대한 노마드는 김교각(金喬覺, 696 ~ 794) 스님이다. 신라왕가에서 태어난 김교각은 그가 18세인 714년에 숙위 학생으로 당나라 수도 장안에 유학을 보낸다. 당나라에서도 신라 왕자 자격으로 현종 등과 교류를 나누면서 좋은 인상을 준다. 그러던 중 4년만에 모친의 급전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고국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를 놓고 형제간에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에 염증을 느낀 김교각은 출가한 후 흰 개 한 마리만 데리고, 혈혈단신으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처음 배를 닿은 푸투오산을 시작으로 항저우 만불사, 석문촌을 거친 후 지우화산에 정착한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능력과 공덕을 쌓았다. 99세인 794년 대중을 모아놓고 입적하는데, 일년 후 시신을 꺼냈는데, 너무 생전의 모습과 같아 금으로 몸을 감싸서 육신보전에 모셨다. 이후 지우화산은 김교각 스님의 출가명인 김지장보살의 정신을 따르고, 중국 4대 불교 명산중에 하나로 불린다.

이곳 사람들은 김교각 스님이 신라 왕자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해 지우화산에서 펴내는 공식 문서에 한글을 병기하고, 안내판에도 한글을 병기한다. 1,300년전의 한 노마드가 정치싸움에 들어가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 선행을 베푼 것이 한·중간 마음을 나누는 가장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중국 다른 불교 명산(푸투오산, 우타이산, 지우화산)은 각각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부처님 제자들을 모시지만 지우화산만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김교각 스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존경의 깊이도 남다르다.

 

삼국시대에는 김교각 뿐만 아니라 고선지, 흑치상지, 혜초, 최치원 등 수많은 노마드 인재가 중국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북방 민족이 육로를 막으면서 한중간에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조선 성종때인 1488년, 제주도에 노비를 감독하는 관직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표류해 저지앙까지 표류해 ‘표해록(漂海錄)’을 쓴 최부(崔溥 1454 ~ 1504) 나 1780년 건륭제의 80세 생일잔치 사절로 베이징을 방문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도가 대표적인 저작이자 노마디즘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다시 한국 노마드들이 존재를 빛낼 시간이 있었다. 바로 일제 강점기를 맞아 의지와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시기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광동 코뮌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사람을 들고 싶다.

 

1927년 4월 4·12정변을 통해 난징정부를 세운 장쩨스(蒋介石)는 군벌 등과 연합해 대대적인 공산당 처형에 나선다. 이 결과 8월 1일에는 난창(南昌), 9월에는 마오쩌둥의 추수봉기가 일어난다. 그리고 12월 11일에는 광저우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광저우기의(广州起义흔히 광동꼬뮌)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희생된 우리나라 사람이 150명이다. 광저우는 홍콩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3시간반이 걸리는 먼 지역이다. 당시는 교통도 나쁘고 돈도 풍족하지 않은 많은 이들이 이 시간에 만나서 목숨을 같이 했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자못 크다. 이 때문에 1964년 중국 군대의 상징적인 인물인 예젠잉(叶剑英)이 주도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谊亭)을 만들었다. 안 비석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인민의 전투 우정은 영원토록 푸르게 빛나리라’(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예젠잉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은 이뿐만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선생이나 윤봉길 의사 등은 중국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이름이었다. 중국인과 교류가 깊었던 단재 신채호나 유자명, 주덕해, 김산 등도 이름이 알려졌다.

특히 문화계에 한류는 이때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광주 출신으로 ‘인민해방군가’ 등을 작곡해 중국의 드뷔시라는 칭호를 받은 정율성, 중국 유일의 영화황제 김염,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한락연 등은 지금도 추앙받는 예술가 들이다.

이중 김염은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필순 선생의 아들이다. 김필순이 ‘이상촌’을 꾸리던 치치하얼에서 일본군 간첩이 준 우유를 마시고, 운명한 뒤 김염은 고모(독립운동가 김순애·1889~1996), 고모부(상하이 임시정부 초대외무총장을 지낸 김규식 박사·1881~1950) 톈진 집으로 간다. 톈진 난카이중학에서 조선 학생을 골리는 이들과 폭력사건으로 학교를 그만 둔 김염은 당시 영화의 고장인 상하이로 건너가 1932년 ‘야초한화’(野草閑花)란 영화로 스타덤에 오르고, 이후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이른바 ‘영화황제’로 군림한다.

그밖에도 1942년 40만 일본군과의 항일전쟁의 숨통을 열고 희생된 조선의용군 윤세주, 동북항일운동의 선봉장 양세봉과 이홍광 등도 중국에 더 알려진 이들이다.

혼란의 시기였지만 그들은 정착하지 않고, 중국을 주유하면서 조국 광복과 더 명징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와 연계되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당대에 노마드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뒤에서 다양한 유형의 당대 노마드들을 소개할텐데, 필자가 생각하는 노마드의 가장 큰 특성은 이 세상에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마드의 반대편에 있는 정착민의 가장 큰 특징은 안정이다. 가령 교수직이나 공무원 같이 신분이 보장되는 삶에 대한 집착은 당대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갖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직장은 필수적으로 앞서 말한 것처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이 일정한 틀을 요구한다. 진짜 노마드들은 이런 똑 같은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노마드들은 이런 직장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키우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이다.

다음 노마드의 큰 요건은 지식에 대한 갈구다. 지식을 얻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혜에 대한 통찰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머잖아 다양한 활동으로도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양한 저술 활동이다. 이후 소개한 노마드들에게는 다양한 저술이 있다. 물론 책을 쓰지 않은 이도 있다.

 

조창완
▲차이나 리뷰 편집장 ▲중국 전문 컨설턴트(투자유치, 방송, 관광객 유치 등)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changwancho ▲저작: 달콤한 중국,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중국여행지 5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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