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김창호칼럼] 닭의 해에 닭들의 수난과 수입輸入까지 해야 하는 계란 파동이 예사롭지가 않다. 최악의 AI(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사태로 계란 값이 폭등하고 물가物價까지 들썩여 모두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망연자실의 상태다.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보다 ‘닭 대신 꿩’이라는 말도 실감이 날만큼 닭이 더 귀하신 몸이 되었다. 

계란도 제대로 살 수 없고 먹지 못하는 팍팍한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리가 없다. 예전에는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맹자의 말씀이 치세의 기본이었고, 요즘은 닭고기 소비가 늘어나야 사회적 행복도도 높아진다는 <치킨지수>라는 개념이 크게 주목을 받는다.

과거에는 사위가 처갓집에 오면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해서 씨암탉도 잡아주었다고 하나 지금도 그런 장모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양에서는 1주일에 한 번은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애민愛民이 돋보이는 군주가 있었다. 1598년 신교도(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낭트칙령>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국왕 앙리 4세(1553~1610)는 즉위식에서 “나는 주일날 저녁에 내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냄비에 닭고기를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후일 광신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자세로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선량한 왕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닭은 풍요로운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후일 <농가월령가>를 편찬한 둘째 아들 학유(1786~1855)가 형편이 어려워 집에서 부업으로 닭을 기른다는 소식을 듣고는 “양계養鷄는 참으로 잘 하는 일이다.”라고 격려하고, “닭을 기르는 것에도 우아하고 비속한 것, 맑고 탁한 것의 구별이 있다. 이익만 생각하고 기를 줄만 알지 운치를 몰라서 이웃 채마밭 노인과 밤낮 다투는 못난 시골사내의 양계법과 독서한 사람의 양계법은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 정유(丁酉)는 육십간지 중 34번째이다. '정'은 적이므로 '빨간 닭의 해'이다. / 사진출처 : 네이버 포토갤러리

야생의 숲에서 직립한 인간을 따라 나와 먹이를 쉽게 얻는 대가로, 사육되면서 식용으로 각광을 받아 자유롭게 나는 것을 포기한 새가 닭이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서 진화의 법칙에 따라 야성과 자유를 잃고 순치된 닭들은 그리 행복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닭 새끼 봉鳳되랴, 닭대가리, 닭싸움, 닭살 돋는다,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랴,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닭 잡아먹고 오리발, 치킨게임, 병아리 오줌 등 비하되거나 욕도 많이 먹고 있다.

닭은 넓은 양계장이나 농장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생산 공장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 갇혀 집단사육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닭은 이제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고 달걀을 낳는 기계처럼 변했다. 닭은 계란 속의 DNA 정보(변형이 불가능한 읽기 전용), <이기적 유전자>가 만든다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따라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해묵은 우문愚問에서 ‘달걀이 먼저다’라는 현답賢答이 나오기도 한다.

가계유식화탕근家鷄有食火湯近 야학무량천지관野鶴無量天地寬. 집에서 기르는 닭은 쉽게 모이를 먹을 수 있지만 펄펄 끓는 물이 늘 가까이 있고, 학鶴은 천지에 식량을 대주는 이 없으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가 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길은 과연 닭의 길인가 학의 길인가. 인생에서 어떤 갈 길의 선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계구우후鷄口牛後 역시 비슷한 함의含意를 갖는다. 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 어느 쪽이 실제로 나은지는 모른다는 느낌이다.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우리가 더 행복하고 더 현명하다 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산대사(1520~1604)는 <오도가悟道歌>에서 “...오늘 낮닭 우는 소리 들으니 장부의 할 일 이미 끝났음을 아노라.”고 득도得道의 경지를 알렸고, 사명대사(1544~1601)는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이러니...잘못하여 여기 닭 무리 속에 떨어졌으니.”라고 백팔번뇌百八煩惱의 어려움을 말했다.

닭은 《한시외전》에서 문文, 무武, 용勇, 인仁, 신信의 오덕五德을 갖춘 존재로 예찬된다. 닭의 벼슬은 관冠 모양으로 입신양명을 뜻하는 문文이고, 발톱은 날카로운 무기의 형상으로 무武를 나타낸다. 용勇은 닭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습성을 말한다. 모이를 식솔들과 함께 나눠먹는 습성으로, 독식獨食을 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 신信은 새벽이 되면 언제나 어김없이 목청껏 아침을 알리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중기에 활약한 선각자 맹자는 “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사람은 순 임금과 같은 무리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척(수천 명에 이르는 강도의 무리를 이끄는 도적 두목)의 무리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별은 이익을 추구하는가, 선행을 추구하는가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 「성모앞에서 눈물흘리는 성 베드로」 이탈리아의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의 작품. / 사진출처 : doopedia

이처럼 새벽에 우는 닭이 못난 우리를 깨우치기도 한다. 성서의 기자記者 마태오의 복음서 26장 34절, 27장 75절에는 사도使徒 베드로는 극구 부인하지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거짓말을 자주 하면서 살아, 성자聖者가 되기 어려운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인자하신 하느님은 용서하시겠지만, 우리는 통닭을 먹을 때마다 세 번쯤은 스스로를 반성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도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1953년 발간) 표제시에서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성에 밝은 제 울음을 크게 홰쳐 울고, 내 또한 무력한 그와 나의 비굴卑屈에 대하여....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써 베개 적시노니.”라고 비통한 심정으로 닭과 인간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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