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술가들은 사랑에 잘 빠지는가?

지해수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왜 예술가들은 사랑에 잘 빠지는가? 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가? 왜 현대인들은 사랑이 어려운가? 쇼팽의 마지막 연인으로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는 ‘창녀’라는 소릴 들을 만큼 정말 많은 남자들을 사랑했었다. 왜 그랬을까?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아니, 사랑을 하니까 그걸 표현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도대체 왜들 그렇게 유별나게 사랑에 열광하느냐는 거다. 

여기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한편을 소개하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너는 몰라도 된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며/ 내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내가 너를> - 나태주

덤덤한 문체이나 이 얼마나 애절한 시인가! 처음 이 시를 접할 때의 나는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고 있었다. 그 때 내 심정이 딱 이랬었다. 그가 만나주지 않아도 좋았다. 나 혼자 ‘그’를 곱씹고 곱씹다보니 나 혼자 그와 친해져있었다. 내가 곱씹고 추억하던 잠깐의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말도 안 되는 나만의 의미부여가 시작되며, 그런 의미를 찾다보니 나 혼자 그에게 어떠한 캐릭터를 가져다 입혔었다. 그렇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상대방에게 빠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한 상대방에게 빠지게 되는 것일지도.

그래서 예술가들이 사랑을 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에 빠질 준비 태세가 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정년퇴임이 없다. 죽을 때까지 제 것을 하면 된다.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 우리는 상상한다. 그러니 아름다운 밤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아름다운 누군가와 있을 것을 상상한다. 상상과 다른 현실에, 당장 옆에 누가 없어 상실감에 젖더라도 말이다.

And there’s not a spark in sight (우리 사이엔 뭔가 스파크가 튀지 않아요)
What a waste lovely night! (쓸데없이 아름다운 밤)
(영화 <라라랜드>ost A Lovely Night 가사 중)

그러다 매력적인 누군가를 마주치면 상상력은 아주 무궁무진, 거칠 것이 없어진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에서부터 그와 함께이면 즐거울 자신을 상상하고, 나중엔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쯤 되니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보단 또래와 연애하는 것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기대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20대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이가 나보다 꽤 많은 사람은 분명 깊은 연애를 여러 번 더 해봤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이별은 사람을 성숙시키니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그는 연애에 대한 기대감이 어린 나보다는 비교적 높지 않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런 경우는 이렇게, 저런 사람은 저럴 것이고, 그 상황에선 그렇게 될거야 라며 모든 게 눈에 빤히 보일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서로에 대한 열정의 온도가 시작할 때부터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이 차이 나는 사람을 안 만나 본 건 아니다. 나는 또래에 비해서도 굉장히 아이 같고, 상상력이 무궁무진한 편이다. 그래, 난 사랑에 정말 잘 빠지는 이른바 ‘금사빠’다. 아니 금사빠도 아니고 ‘급’사빠다. 아무에게나 반하진 않지만, 반할만한 사람에게는 급속도로 빠져든다. 이런 나를 상상하게 만든 나이 많은 남자들은 다 예술가였다. 그들은 내 나이 못지않은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날 상상할 줄 알았다. 누구보다 사랑에 잘 빠지지만 사랑에 상처받는 것을 겁내지 않았던 사람들. 누가 그러지 않았나.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거라고.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금기시되는 것을 할 때의 희열? 그 때문만은 아닐 거다. 자신의 배우자와 꽤 오래 지냈다 치자.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기대하고 상상할 게 많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누군가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불륜은 나쁘다. 그러나 결혼을 안 해봤지만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그 감정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결국 사랑은 상상력으로 하는 거니까 짝사랑도 사랑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혼한 상태에서 육체적인 접촉 없이 누군가를 짝사랑만 하더라도, 그것 역시 불륜인가? 만일 당신의 배우자가 침대에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상상한다면? 내 예상이지만 그런 일들은 꽤나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맙소사, 그럼 다 불륜해본거야!?

홍상수와 김민희가 사랑에 빠진 것도 둘 다 예술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은 일평생 ‘영화’라는 예술을 해오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미남 배우와 만났던 김민희에게 나이 많은 홍상수 감독은? 늘 상상의 것 이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을 거라 감히 짐작해본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 세계만 봐도 얼마나 독창적인가.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감탄과 기대의 연속이었을 거다. 그러니 서로를 줄곧 상상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나이차를 너머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비슷했던 거다. 그러니 모든 걸 다 희생할 만큼 저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거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정말 안타깝고 잘못한 일이지만, 이 둘의 행보는 예술가로서는 멋진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긴 하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느끼겠지? ‘I’m alive!(난 살아있어!)‘

그렇다.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 거다. 살아지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가는 것이다. 

정말이다. 기대와 상상이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라면, 인간은 ‘감탄’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갓난쟁이 시절 ‘ㅇㅂㅂㅂ’할 때 우리의 부모들은 그게 ‘아빠’하는 거라며 감탄했다. 뭐만 조금 잘해내면 ‘이 아이가 뭐가 될까’상상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도 하고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감탄과 기대, 상상! 우린 그걸 먹고 자랐다. 신이 인생을 즐겁게 살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 중 제일은 아마 ‘사랑’을 통한 것일 테지. 

상상력과 기대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할 줄 모르면 사랑받을 수 없다. 즉, 상상력이 없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되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상대방에게 나에 대하여 상상하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글쎄, 둘 중 한 사람은 뇌가 말랑말랑 상상의 나래를 펼칠 줄 알아야지!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나에게 실망할까봐, 사랑을 겁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들 어떠하리. 관계가 이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내가 그리던 상상과 실제 그는 어느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업, 나이, 학력, 부모님 재산 같은 걸로 거짓말 하지 말고 내가 가진 ‘나’안에서 나를 자꾸 상상하게 만들어라. 상대방에게 ‘나’라는 사람을 꿈꾸게 만드는 거다. 자꾸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당신 역시 매일 밤, 상대방을 상상해라. 기대하고 꿈꿔라. 그 꿈이 잔뜩 담긴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거다. 

내 눈에 담긴 꿈이 보여? 내 눈에 담긴 네가 보여? 그래 맞아, 이 안엔 네가 있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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