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2월 14일 뤼순에서...

[공감신문] 많은 이들이 2월 14일을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발렌타인 데이로 알 것이다. 그러나 2월 14일은 발렌타인 데이 만이 아니다.

“사형”

1910년 2월 14일 31살의 청년이 재판에서 듣기엔 이르고 어색한 단어다. 그러나 청년은 사형이란 판결에도 불구하고 의연했다. 오히려 국가 원수를 처단했다는 자긍심에 눈빛이 빛났다.

이날 재판을 참관한 한 영국 기자는 ‘일본 유명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청년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왕관을 거머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재판장을 퇴장했다’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이 청년은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가, 천주교인 안중근이다. 2월 14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로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 받은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 의사의 조부 안인수는 4백석의 거대한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안중근은 자신의 일대기를 서술한 책 ‘안응칠 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당시 많은 국민들이 힘들었던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상황을 생각하면 안 의사가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먹고 살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산이 풍족했다. 이런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안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간다.

그러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한다. 안 의사는 생각과 다른 결과에 매우 실망한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

안 의사는 부친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 교육운동을 시작한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한다. 이때 안 의사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한다. 이후 군대가 해산 되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 이를 분하게 여긴 국민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국가를 위해 교육에 매진하던 안 의사도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노선을 바꿔 강원도 의병에 가담한다.

의병 활동을 하던 안 의사는 더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펼치기 위해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한다. 이때 안 의사는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진다.

 

“대한 독립 만세”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한다.

거사 5일 전인 10월 21일,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다.

안 의사의 당초 계획은 장춘의 남장춘, 관성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해 암살을 시도하고, 안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채가구역 계획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한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한다.

이때 안 의사는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한다.

이외에도,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한를 총격한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라고 크게 외친다. 러시아어인 이 말은 우리말로 “대한 독립 만세”다.

안 의사는 곧바로 러시아 공안들에게 체포된다. 안 의사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려 러시아 변호사까지 선임한다.

하지만 일본 제국 정부는 안 의사를 자신들의 관할지인 뤼순으로 데려간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 이유 15가지를 밝힌다.

1. 한국의 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 의사가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수의(죽어서 입는 옷)와 편지를 보낸다.

다음은 편지 내용이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을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은 지 한달이 좀 넘은 같은해 3월 26일 생을 마감한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우려한 일본이 유해를 곳곳에 숨겨놨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안 의사는 사형장에서도 당당함과 기개를 잃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그의 희생과 기개를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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