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윈스턴 처칠

현재 대한민국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내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보복, 일본 역사 왜곡 등 다양한 외교문제에 직면해 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우리 역사 속 인물들이 펼쳤던 외교 정책을 정리했다. 그들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고, 결과는 어땠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정세를 파악해 중립외교 정책을 실시한 왕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왕이다. 본명은 이혼(李琿)이다. 임진왜란 이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해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分朝)활동을 전개했다. 분조란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을 뜻한다.

광해군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를 조달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를 위해 노력했다.

이후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다.

영화 '광해' 포스터

그가 왕위에 오르자 조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明)나라가 점차 쇠퇴한다. 이런 와중에 여진족이 후금(金)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한다. 명은 조선에 임진왜란 때 도왔다는 사실을 들며 출병을 요구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당시 상황을 볼 때, 강성해진 후금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는 명군을 도우러 간 장군 강홍립에 정세를 보아 후금에 투항하라 명한다. 이에 강홍립은 후금이 우세하다고 판단해 투항한다.

명을 도우러 간 조선군이 후금에 투항하자 명분을 중요시 하는 서인세력은 명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강하게 비난했고, 결국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퇴위 시킨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조선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실시한다. 친명배금은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책과 다르게 강성해진 후금은 명을 물리치고 청나라를 세운다.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후금에 뿌리를 둔 청은 조선이 친명배금을 취했다는 이유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두번의 난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노예로 끌려갔다. 왕인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바닥에 찧는 굴욕까지 당한다.

광해군이 퇴위 당하지 않고, 중립외교 정책을 이어갔다면 호란이 일어났을까.

광해군의 묘 / 출처=두산백과

상대 의도를 파악해 영토를 넓힌 외교가

서희(徐熙)는 고려의 외교가이자 문신이다. 

고려 성종 때 거란족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다. 고려가 친송(親宋)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와 전쟁 중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고려 조정과 신하 대부분은 거란이 원하는 서경 이북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달랐다. 그는 고려 조정·신하들과 달리, 거란의 침략 의도가 친송 정책 철회와 고려·거란 교류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 이후 서희는 거란 장군 소손녕을 만난다.

이인영 作 /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서희는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라는 소손녕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신으로서 당당하게 주장을 편다.

서희는 거란이 원하는 대로 교류하기로 하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강동 6주를 확보한다. 하나를 주고 둘 이상을 얻은 것이다.

서희와 소손녕이 담판한 지 몇 년 뒤 거란은 무력으로 고려를 2차례나 침입한다. 이후 고려는 거란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결사 항전한다. 양국은 3차 전쟁까지 치른 뒤 협상을 맺는다.

서희가 시간을 소손녕과 외교 담판으로 시간을 벌었을 때 고려가 전쟁에 충분히 대비했다면 거란이 2차례나 더 침입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강동 육주 /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한 개화 운동가

유길준(兪吉濬) 대한제국 말 정치인이자 개화 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최초 국비유학생이다.

유길준은 갑신정변 이후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는 등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의 대립이 가열되자, 조선 중립화론을 제기한 인물이다.

조선 중립화론은 중국, 일본, 서구 열강 등에 둘러싸인 조선도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 지위를 획득하자는 주장이다.

영세 중립국은 다른 나라간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킬 의무를 가진 국가를 말한다. 이는 영세중립조약이라는 국제법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발생한다. 조약 체결국으로부터는 영세중립국으로서 영토 보전과 독립이 보장된다.

그러나 유길준은 당시 조선에서 이권을 챙기는 일본 등 열강의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계략인 조선의 '자치육성책'을 오판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부강해지면 국권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유길준은 한일병합을 용인하지는 않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었으나 유길준은 거절했다. 이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교육과 계몽사업에 헌신한다.

그는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를 실천목표로 정해 흥사단(興士團)을 발족해 활동했다.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화 운동가 유길준

번외편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팔아 먹은 인물도 준비했다. 바로 이완용(李完用)이다. 

그는 대한제국 말 을사5적신 중 한 사람이다.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당초 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그는 1888년 12월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미국에 파견된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모임에 가담해 친일, 친청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된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힘을 느낀 이완용은 이때부터 친일파로 바뀐다.

그는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해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한다. 또 적극적으로 늑약에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된다.

이완용은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토의 추천으로 1907년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1907년 이완용은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헤이그특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이후 순종에 왕위를 넘길 것을 강요하고, 순종을 즉위시킨다. 그는 1909년 7월,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준다.

앞으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이들이 나오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이완용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치고 노예로 끌려갔다. 당시 정권을 잡았던 세력이 명분보다 백성을 더 생각했다면 '병자호란이 발생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고려는 서희가 담판을 통해 유리한 조건을 점하고, 국방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유길준 선생이 주장한 조선 중립화론이 이뤄 졌다면 '대한민국의 상황이 지금과 달랐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내외 여건이 매우 좋지 않다. 이럴 때 일수록 역사를 되돌아 보고, 권리와 의무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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