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이 질문에 우리는 대답이 가능할지 모른다. 다만 당신이 나의 은유를 받아들인다면 말야.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며칠 전 우디 앨런(Woody Allen)감독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mighty aphrodite, 1995)>를 보았다. 평소 그의 영화 스타일을 유쾌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정말 반해 버린 거다. 귀엽고, 또라이 같고, 즉흥적이고, 야하고, 순발력이 있었다.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스 희극’풍을 갖고 들어온 기발한 플롯!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아서 그 영화가 끝나지 않길 바랐지만, ‘그리스 신들의 연극’이 막을 내리더라. 그런데 중요한건 영화에 대한 내 감상평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 나의 오래되고 쓸데없이 무거운 질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할 만한 답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건 바로 예술가와 엔터테이너의 차이였다. 예술가와 그냥 ‘그래 보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의 차이, 더 나아가 예술가란 어떤 사람을 일컫는 가에 대하여! 나는 이 영화가 엄청난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천재라고 생각한다. 왜? 난 이 영화를 보며 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가란 대중들로 하여금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또는 ‘어떻게 저렇게 표현(해석)을 했지?’라고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물론,  나만의 정의일 뿐이다. 

저 영화는 (스포일러할 맘은 없지만) 우선 사건의 발단만 보아도 재미있다. 극 중 입양한 아들의 친모를 찾으며 시작되는데, 그 이유와 심리 상황이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돼서 말이 안 나온다. 우디앨런 자신이 극 중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다. 한국인 여아를 입양한 적 있던 우디앨런 자신이, 입양을 원하는 부인에게 ‘어떻게 입양아를 키우냐’고 질색하며 연기하는 것 자체가 우선 코미디다.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 

그러다가 입양된 아들이 겨우 말문이 트이자마자, 굉장히 똑똑할 뿐만 아니라 미남으로 커 가는 게 아닌가! 물론 그는 세상 제일 팔불출 아빠가 된다. 그래서 아이를 원하던 부인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니다. 그는 응큼하고 똘끼 충만한 우디앨런이 아닌가...? 그는 궁금해진 거다. ‘저 아이의 친모는.... 굉장히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여자이지 않을까?’

우디앨런은 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할지 늘 궁금하다. 수작을 만드는 감독들은 많다. 하지만 매 작품마다 기대를 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디앨런이나 팀버튼처럼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우릴 놀라게 할지 궁금하다. 그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더욱 그러하다. 촬영장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스타벅스 저지방 라떼를 마시고, 양변기에서 변을 누고, 아이폰으로 촬영 헌팅을 다니고, SNS로 세상도 보고, 몇 년 전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었을 저 이는 왜 우리랑 다른 생각을 하냐는 거다. 저런 발상이 어떻게 나왔냐는 거다! 그리고 어쩜 저렇게 표현(해석)하냐는 거다. 그게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천재다 그리고 예술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반면 엔터테이너를 보자. 우리는 수많은 엔터테이너들을 알고 있다. 세상은 예술가만을 원하지 않는다. 예술 감상은 때론 우리에게 너무 벅찬 것이다. 마치 산뜻하게 젖은 솜뭉치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다 마르기 전엔 헤어 나올 수 없다. 우린 쓸데없이 가벼운 것들도 필요하다. 엔터테이너들은 그걸 돕는다. 그들 역시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건 타고난 재능, 잘 가꾼 외모, 노력의 결과일 것 이다. ‘천재’일수도 있다. 가끔 티비에 나와서 우릴 놀라게 하는 꼬마 신동들도 천재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예술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업 과정 자체가 그다지 궁금하진 않기 때문이다. 
보아, 빅뱅, 그리고 김연아가 성공했을 때 그들에 대한 다큐가 나왔었다. 데뷔 전 혹은 연습 때의 영상들이다. 사람들은 그걸 관심 있게 시청했다. 어떻게 ‘저렇게’ 됐는지 궁금해진 거다. 어떤 배우가 한 영화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정말 예술적으로 소화해내면 이런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연구했냐고. 어떻게 ‘저렇게’ 해석해서 표현했는지 궁금해진 거다. 
‘고전’이라 불리는, 세기를 거쳐 온 예술가들은 작품만 유명한 게 아니다. 우린 그들의 생애를 궁금해 한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거나 서적을 읽는다. 어느 여행지에 가면 그 사람 생가를 방문하기도 한다. 왜? 그의 ‘HOW TO’가 궁금해서다. 그 경이로움에 예찬하며. 

초면인 자리에서, 나에게 무슨 일 하느냐는 질문에 작가라고 대답하면 남자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한다. ‘아, 저도 어릴 때 글 쓰는 것 좋아했었는데.’ 그렇다. 글쓰기가 게임도 아닌데, 당신 말고도 다들 그렇게 좋아했다더라. 그 중에서 정말 한명 정도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어 했을 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러나 이런 걸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은 안다. 미술, 음악, 연기, 춤 모든 게 비슷한 맥락인데 막상 펜을 드는 순간, 붓을 드는 순간,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상상력과 몸이 굳어버린다는 거다. 펜과 입이 마른다. 
말들은 쉽게 한다. ‘해수야 오빠가 이런 기막힌 아이디어가 있는 데 네가 시나리오로 써보렴.’ 
미안하지만 ‘기막힌 발상’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밤마다 말도 안 되는 꿈들을 꾼다. 그걸 가공시키면 우리도 우디앨런보다 더 천재적 병맛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은 ‘과정’이 자체인 것이다! 그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예술 활동이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Art & Fear)>라는 책에서도 한권 전체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단 하나다. 예술가는 평생 그 창작 과정을 탐구하고 해내는 사람이라는 거다. 지겹고 불완전하고 외로운 그 활동을, 꾸준하게.  
재능?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재능이 있다면 좀 더 빨리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목적이나 방향 감각 없는 재능은 무의미할 뿐이다. 이 세상은 위대하고 눈부신 천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세상은 곧 그들이 재능이 있는 지 없는 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력’ 역시 재능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타고난 끼나 외모로 데뷔했던 8-90년대 연예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직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예계의 문턱이 높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연예인들은 타고난 걸로만은 절대 안 된다. 이건 예술가와 엔터테이너를 불문하고 그러하다. 바늘구멍 같은 연예계뿐만이 아니다. 어느 분야든지 재능이나 천재성보다 가치 있는 것은 노력이다. 

엔터테이너와 예술가 중에 누가 더 낫고 안 낫고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건 정말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유쾌함을 주느냐, 사랑받느냐가 중요한 거다. 누가 예술을 하고 안하고는 정말 ‘그들만의 리그’의 일이다. 단,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예술가들이 조금 더 ‘탁월한 인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은유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다는 것이다. 
도스토옙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양파’를 ‘천국으로 가는 동아줄’이라고 은유했다. 우디앨런은 저 영화에서 불안한 두 남녀가 ‘양파 농장’을 하면 남들처럼 잘 살 거라고 말했다. 우디가 도스토옙프스키를 가공하여 다시 자기 세계를 만든 거다. 도스토옙프스키와 우디앨런을 아는 나에게 ‘양파=천국’이다. 그들의 은유에, 넘어갔다. 은유는, 그 세계로 누군가를 끌어 들이는 것이다. 엔터테이너는 그걸 안하지만, 예술가는 한다. 그러므로 좀 더 탁월한 인간이다. 

 (표도르 도스토옙프스키 1821-1881)

우리는 자꾸 인생을 영화같이 살아라, 예술처럼 살라고 강요받는 것 같다. 근데 예술로 산다는 게 과연 좋은지 모르겠다. 영화 <타짜>에서 아귀(김윤식 분)가 평경장(백윤식 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그 양반 갈 때도 아주 예술로 가는구먼!”
그건 평경장이 살아온 삶이 예술 자체였다는 의미다. 근데 평경장의 삶이 우리 눈에 행복해 보였던가. 
그 밖에도 예술로 살다간 실존 인물들은 정말 많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역적>에 나오는 연산군도 그러하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를 꾸준히 그려왔고, 우린 늘 그가 궁금했다. 단지 그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 사고가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어떻게 저렇게 미치광이가 되었지?’, 마치 예술 작품을 보듯 ‘그’를 떠올리면, ‘어떻게?’, ‘저렇게?’가 궁금해진다는 거다. 그가 인생을 예술로 살았다고 우리가 증거 해주고 있는 거다. 예수, 사도세자, 고종, 마리 앙뚜아네트, 히틀러, 모두가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는 기록들이 답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해석엔 ‘답’이 없다. 단지 배우나 감독과 같은 예술가들이 은유한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일 뿐. 
위대한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이렇게 말했다지, “컴퓨터는 쓸모없는 물건이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답뿐이니까.” 그러니까 컴퓨터 자체도 예술이 아닌 거다. (애플은 예술인 것 같긴 하지만...)

그냥 감상자의 삶을 충실히 누려도 된다. 그런 해석들에 충분히 잘 젖어드는 것도 대단한 EQ를 가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일 지도 모른다. 탁월한 것보다 더 좋은 건 행복이니까. 어른들 말씀이 여기서 꼭 맞다. ‘예술은 그냥 취미로 해~’ 맞다. 예술로 사는 거? 가끔 심심할 때, 그렇게 살면 된다. 영화 같은 곳에 가고 그렇게... 

예술가가 되는 것은 자기 역량일지 몰라도, 예술로 사는 것은 자기 역량 밖에 일 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 참고문헌 :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즈 저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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