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동물이고 짐승, 이론의 여지 없는 정론

[공감신문] 인간도 동물이고 짐승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다. 그러나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크다. 특히 개나 소, 사자 등 짐승의 대부분은 불과 1~2년이 지나면 다 큰 ‘어른’이 되는데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나도 ‘어른’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 인간은 20~30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나이 50~60이 넘어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공자 같은 성현(聖賢)도 50이 넘어서야 지천명(知天命)한다고 말했고,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 거백옥은 50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고 해서 나이 50을 지비(知非)라고 한다. 17세기 조선의 정계와 학문을 이끈 허목(1595~1682) 선생은 ‘자명비’(自銘碑)에서 “말은 그 행실을 덮어주지 못하였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 그저 요란하게 성현의 글 읽기만을 좋아했지만 하나도 자기 허물을 고치지 못했기에 돌에 새겨 뒷사람을 경계한다.”고 죽을 때까지도 인간이 되지 못함을 크게 한탄했다.

인간이 다른 짐승들에 비해 매우 우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 너무 늦게 현명해진다. 인간은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산다. 그리고 우리는 불행히도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을 많이 보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데는 수만 년이 걸렸으나, 인간이 짐승으로 돌변하는 것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험하게 된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끔찍한 동물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떤 동물이 존재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거나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개의 조상이라고 믿어지는 개과의 포유류, 또는 야생의 늑대가 가축인 개가 되는 데는(인위선택의 결과) 5,000세대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직립한 인간을 따라 숲에서 나온 이들은 개가 되어 일용할 양식은 쉽게 해결했으나 그 대가는 컸다. 초원에서 필요했던 순수한 야성을 잃었고 자유를 상실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을로 들어온 개들은 오명(汚名) 속에서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개를 내세우거나 개와 관련된 욕도 많이 하고 있는 세상이다. 개XX, 개OO, 개 같은 등은 매우 심한 욕에 속한다.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답다는 우리말과 글에 개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좋은 말은 개고기 외에는 거의 없다. 그것도 점잖은 선비들은 구씨보살(狗氏菩薩)이나 보신탕 등으로 높이거나 순화해 불렀다. 개털, 개판, 개 값, 개죽음, 개고생, 개뿔, 개수작, 개소리, 개망나니, 상갓집 개, 죽 쑤어 개 준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복날 개 패듯, 서당 개 삼년에 풍월, 개 팔자가 상팔자, 개발에 편자, 초장 끗발 개 끗발, 하룻강아지, 멍첨지,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권력의 주구(走狗) 등등. 사육된 개들은 인간에게 욕을 많이 듣고 모멸적인 은유와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왕년의 영화 ‘몬도가네 (Mondo Cane)’는 이태리어로 ‘개 같은 세상’이다.

개는 인간의 친구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인간을 개와 비교하는 많은 표현들도 널리 통용된다. 인간과 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악착같이 싸우는 것이 고질이 된 우리 정치판을 두고 이전투구(泥田鬪狗)라는 표현도 많이 동원된다. 소위 국민의 대표, 선량(選良), 또는 유력 정치인이라는 뛰어난 인물들이 설마 진흙탕의 개처럼 그렇기야 하겠나는 지적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지만 ‘짐승보다 못하다’는 등 이판사판, 난리법석, 난장판을 자주 연출하는 개탄스러운 정치현실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개들이 이처럼 나쁜 상황에 견주어지고 지나치게 욕을 먹는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었나. 인간의 잘못인가, 개의 잘못인가. 그들이 인간에게 실망을 주고 배신을 했는가. 오히려 인간이 그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학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는 억울할 것이다. 사람을 무는 미친개가 광견狂犬이고 주인의 목숨을 구하는 개가 의견(義犬)이다. 종종 매스컴에 주인의 목숨을 구한 의로운 개의 얘기가 보도되기도 하지만,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등에도 사람을 구한 의견 얘기가 나온다.

독설과 풍자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01)은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 집 개가 더 좋아진다...굶주린 개를 주워 잘 돌보면 그 개는 당신을 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인간과 개의 근본적인 차이다.”라고 말했다. 고려 후기 문인 최자(1188~1260) 선생의 시화집 ‘보한집補閑集’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개라고 불리면 다 부끄러워하면서 큰 은혜를 입고서도 그 주인이 위급할 때 죽을 줄 모르니 어찌 개만이나 하랴.”

속분서(續焚書) / 사진출처=행운서점

망국(亡國)의 시절, 우리는 누구의 개가 되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1939년 강도(强盜) 일본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견자犬者, 구자狗子, 견공犬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처절한 자조(自嘲)이자 통절(痛切)한 야유(揶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는 ‘초원의 푸른 늑대’는 커녕, 자유로운 들개도 아니고, 일제(日帝)의 사냥개, 애완견(愛玩犬)이나 충견(忠犬), 잡견(雜犬)이 되는 길을 쉽게 택했다. 풍찬노숙(風餐露宿), 산행야숙(山行野宿)하는 늑대와 같은 독립군이나 애국자가 되는 길은 어려웠지만, 집의 뜰에서 먹고 자는 친일파 똥개가 되는 길은 편했다. 이름을 바꾼 겁 많은 개들이 특히 크게 짖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한 개들은 계속 상팔자를 누렸다.

명(明)말(末)의 불우했던 사상가 이탁오(1527~1602) 선생은 ‘속분서續焚書’에서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은 것이었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고 자탄했다. 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처음 짖으니 개 열 마리가 따라서 짖어댄다(一犬吠影, 十犬吠聲)는 형국이다. 처음 짓는 개는 좋은 개인지 모르나, 다른 개가 짖는다고 마구 짖어대는 개는 그리 좋은 개가 아닐 것이다.

글 장 앙리 파브르, 그림 정수일, 역자 김진일, 현암사 2010.03.02 / 사진출처=네이버 책

곤충학의 시인이자 위대한 사상가 파브르(1823~1915)는 고전 ‘파브르 곤충기’에서 “인간은 깎아 내리고 동물은 추켜올려 비슷한 접촉점을 설정해놓고, 양쪽을 동일 수준에서 보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고차원의 학설”이라고 비틀어 비판한다. 동물들을 지나치게 의인화(다른 종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하거나, 인간과 동물을 서로 비교해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 근거가 부족한 낭만주의적 발상이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동물행동학 연구자들이 개새끼와 늑대새끼를 두고 흥미로운 실험을 한 사례가 있다. 잠긴 상자 속에 먹이를 넣어놓고 자물쇠를 풀어 수차례 먹게 한 후, 자물쇠를 다시 잠가놓고 개새끼와 늑대새끼의 반응을 살폈다. 개새끼는 상자를 열려고 몇 번 시도를 하다가 열리지 않자 아예 열기를 포기하고 사람만 쳐다보고 있는 반면 늑대새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잠긴 상자를 열려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을 따르는 것이 먹이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개새끼는 이미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오랜 진화의 결과, 개새끼와 늑대새끼는 이처럼 서로 달라졌다. 개와 늑대는 다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인간과 짐승도 서로 다른 것이 옳고, 짐승보다 못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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