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난 8일 영국 프로축구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England Premier League)에 소속된 프로축구클럽 토트넘(Tottenham Hotspur FC)의 홈구장 런던 화이트 하트 레인(White Hart Lane)에서 동양인 축구선수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왓퍼드와 경기에서 토트넘 공격수로 출전해 2골을 넣으며 2016-2017 시즌 EPL과 컵대회를 포함한 전체 득점 18호골을 기록했다.

이 같은 기록은 아시아 선수사상 최초로 EPL 한 시즌 10골을 넘긴 기록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짐작했겠지만 토트넘 동양인 공격수는 대한민국의 손흥민 선수다.

손흥민의 시즌 18호골은 전 축구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차범근이 보유한 한국선수 유럽무대 한 시즌 최다 골인 19골과 한 골차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1985-1986시즌에 19골을 넣었다.

토트넘 손흥민 선수

2002년 전설이자 한국 축구계 레전드로 불리는 박지성은 2005-2006시즌부터 2012-2013시즌까지 EPL에서 활약했다. 그는 8시즌 통산 총 27골을 기록했다.

2015-2016시즌부터 EPL에서 뛴 손흥민은 현재 총 26골을 넣었다. 한 골만 더 넣으면 박지성의 27골과 같아지고 한 골을 더 넣으면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토트넘은 앞으로 프리미어리그 경기, FA컵 준결승 등을 포함해 최소 7경기 이상을 남겨 둔 상황이다. 이에 많은 이들은 손흥민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차범근의 기록과 박지성의 기록을 경신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손흥민의 결과가 단지 혼자 잘했기 때문일까? 박지성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대단한 실력을 보유한 선수고 이에 대한 이견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성도 2012-2013시즌 EPL 퀸스파크 레인저스(QPR)에서 뛰었을 때는 다소 아쉬운 경기 결과를 보였다. 이는 팀 전체적인 경기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과 다르게 팀 내 경쟁자가 없던 게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토트넘 손흥민 선수와 그의 동료 델리 알리

손흥민은 늘 토트넘 공격수 해리 케인(Harry Edward Kane)과 에릭 라멜라 (Erik Lamela)와 비교됐다. 이들과의 비교가 그를 더욱 강하게 하고, 차범근과 박지성의 기록이 더 노력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sports)는 ‘경쟁과 유희성을 가진 신체운동 경기의 총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른 팀과의 상대 선수와의 경쟁, 팀 내 같은 위치 선수와의 경쟁 등 스포츠는 수많은 경쟁의 연속이다.

스포츠는 종목별로 특히 주목을 받는 경쟁이 존재한다. 이번 편은 그 경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퍼팩트 게임, 최동원과 선동열

선동열과 최동원은 대한민국 야구사상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로 꼽을 수 있다. 둘은 고려대와 연세대라는 대학 경쟁을 시작으로 해태 타이거즈(현재 기아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라는 프로팀 경쟁으로 이어졌다.

선동열과 최동원

최동원과 선동열은 팀 라이벌을 떠나 실력적으로도 서로에게 큰 경쟁자였다. 사실 둘은 선·후배 관계로 당초 라이벌이 아니었지만 각자의 실력이 상승하면서 언론 등을 통해 주목 받고 비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선동열은 한국시리즈 6번 우승했고, 7년 연속 평균자책점 수위와 4차례의 다승왕을 차지했다. 아울러 3번의 정규시즌 MVP와 6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최동원은 1981년 롯데자이언츠를 실업리그 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인왕, 다승왕, MVP를 수상했다. 그는 KBO 리그 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린 투수다.

또 역대 단일 한국시리즈 8개부분 '최다 이닝, 최다 승리, 최다 선발등판, 최다 선발승리, 최다 완투, 최다 완투승, 최다 완봉승, 최다 탈삼진'에서 1위를 기록 중이다.

이들 각자의 기록은 KBO사상 역사로 남을 만큼 뛰어나다. 이들의 실력이 뛰어나서기도 했겠지만 서로를 의식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기 때문에 앞서 밝힌 기록들이 생산됐으리라 생각한다.

선동열과 최동원

지난 2011년에는 선동열과 최동원의 경쟁을 그린 영화, 퍼팩트 게임이 개봉되기도 했다. 최동원은 영화 개봉일인 2011년 9월 14일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 일기로 별세했지만, 선동열과 그의 이야기는 야구팬 마음속 깊이 간직되고 ‘서로의 발전에 영향을 준 멋진 라이벌’이었다고 회자될 것이다.

◈ 전쟁보다 더 치열한 ‘엘 클라시코’

최근 국내 축구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해외 축구리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세계 양대리그로 불리는 영국의 EPL과 스페인의 LaLiga(라리가)가 특히 큰 인기를 끌고 있다.

EPL에도 오랜 경쟁의 역사를 가진 팀들이 많지만 라리가의 엘 클라시코 만큼은 아닐 것이다.

엘 클라시코(El Clásico)는 스페인 라리가의 최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이르는 말이다. 특별한 대회가 아닌 일반 리그 경기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경기중 하나다.

엘 클라시코는 가장 흔히 쓰이는 명칭이지만 카탈루냐어로는 엘 클라식이 되며 간혹 엘 수퍼클라시코(El Superclásico, 클라시코의 뜻을 한층 더 강화함)으로 불리기도 한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라이벌이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한다. 20세기 초반 스페인 내전을 겪었다. 이 때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 내전에서 승리했고, 마드리드를 반대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탄압했다. 엘 클라시코는 지역감정에서 비롯됐다.

엘 클라시코에는 정치세력도 개입했다. 1943년 6월 13일 마드리드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코파 델 레이 준결승 2차전이 열렸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바르셀로나가 3-0으로 승리해 결승 진출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11-1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였다. 라리가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며 10위에 그친 레알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의혹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은 카탈루냐 언론들 통해 경기가 시작되기 전 스페인 국가보안부장이 바르셀로나의 탈의실에 들어와 "당신들이 마음 놓고 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정권이 그것을 눈감아주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진지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제대로 경기에 임할 수 없었고 11-1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했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 경기는 당시 스페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양측의 구단주가 스페인 축구 협회의 권고로 퇴임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 경기에 대해 바르셀로나에 정식으로 사과했으며, 11-1이라는 결과 역시 스페인 축구 협회를 통해 무효화됐다.

엘 클라시코는 정치권에서 개입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받는 경기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그동안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영입하며 서로를 견재해왔다. 현재는 레알 마드리드의 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와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가 엘 클라시코에서 겨루고 있다.

◈ 대학 스포츠 경쟁, 고연전이 맞을까 연고전이 맞을까

앞서 최동원과 선동열 편에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라이벌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 친선경기는 애교심을 고양하고 연세대와 고려대 양교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년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연세대 주최 시 ‘고연전’, 고려대 주최시 '연고전'으로 서로의 원정 학교의 앞 글자를 우선해 칭한다. 경기 종목으로는 축구, 농구, 야구, 아이스하키, 럭비가 있다.

고연전과 연고전, 연고전과 고연전

이들의 대결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1927년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8회 전조선 축구대회 준결승에서의 보성전문학교 축구부와 연희전문학교 축구부의 대결이 두 학교의 정식 시합이었다.

1929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연희전문학교를 이겨 두 학교의 대결이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1930년에 두 학교가 농구에서도 겨루게 되면서 이들 경기가 ‘연·보전’(또는 ‘보·연전’)으로 일반인들을 통해 불리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적인 경기’가 된 두 학교 대결에서이긴 쪽은 우승기를 들고 교가를 부르면서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이후 1943년 일본이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중단됐다가 광복 이후 부활하면서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특히, 고려대와 연세대는 1990년대 농구대잔치에서도 경쟁하며 각 팀 선수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주목을 받았던 선수로는 이상민, 서장훈, 현주엽, 우지원 등이 있다.

연고전과 고연전, 고연전과 연고전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 선수들은 프로팀에 진출하고 이후 은퇴해서도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 진짜 테니스의 왕자는 누구인가, ‘페더러와 나달’

라파엘 나달((Rafael Nadal)과 로저 페더러(Roger Federe)는 테니스 계에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나이로는 페더러가 나달보다 형이지만 전적은 나달이 앞선다. 이들의 각자 개인 기록을 본다면 둘 모두 전설이라 부를만 하다.

나달은 스페인 출신이다. 그랜드 슬램 단식에서 14회 우승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 대회에서도 28회 우승했다. 스페인이 데이비스 컵에서 우승했던 2004, 2008, 2009년, 그리고 2011년 당시 스페인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페더러와 나달

페더러는 스위스 출신이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37주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해 역대 최장 연속 랭킹 1위 기록을 세웠다. 총 302주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했다.

그는 많은 스포츠 전문가들과 비평가들, 전·현역 선수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둘은 이외에도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수상경력과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나달과 페더러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라이벌전을 펼친 선수로 평가받는다. 두 선수는 테니스 역사상 유일하게 만 5년 연속으로 ATP 랭킹 1·2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페더러는 2004년 2월부터 237주 연속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지켰다. 페더러 보다 어린 나달은 2005년 7월부터 160주간 연속 세계 랭킹 2위를 기록했다.

페더러가 앞서가고 나달이 뒤쫓는 이러한 구도는 2008년 8월 나달이 페더러를 제치고 랭킹 1위로 올라서면서 깨졌다.

페더러와 나달

이후 나달이 무릎 부상으로 인해 랭킹이 3위까지 떨어지면서 2009년 7월 페더러가 다시 랭킹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나달은 같은 해 9월 랭킹 2위로 올라왔다가 2010년 2월 다시 4위까지 떨어졌다. 이후 5월에 마드리드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면서 다시 한 번 2위 자리를 회복했다.

그리고 2010년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또 한 번 페더러를 제치고 세계 랭킹 1위로 올라섰다.

특히,  페더러와 나달의 2008년 윔블던 결승전은 매우 극적이고 뛰어난 전문가들에 의해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은 마스터스 시리즈 결승에서도 10번 만났으며, 이중 2006년 로마 마스터스 결승에서는 5시간에 걸쳐 풀세트 접전을 벌인 끝에 나달이 마지막 5세트 타이 브레이크를 따내며 승리했다. 두 선수 상대전적에서는 나달이 23승 12패로 앞서고 있다.

페더러와 나달은 현재도 라이벌로 불리고 있다. 테니스 계에 나달과 페더러 같은 라이벌이 또 등장할까.

나달과 페더러

우리나라 속담 중에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경쟁이 과하면 독이 되지만 고이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이번 편을 통해 선의의 경쟁과 라이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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