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 왕가위

(출처:네이버 영화)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공감신문] 사랑에 완성이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완성 되는 것일까. 굳건한 믿음? 음. 영원한 죽음? 글쎄. 신성한 결혼? 에이. 그렇다면 사랑의 미완성에 대해 말해보자. 아마 비교적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실패한 짝사랑, 불의의 사고, 외부적인 요인으로인한 어쩔 수 없는 이별, 사별의 고통 등 남들에게 가십거리 마냥 꺼낼 수 없는 자신만의 미완된 사랑이 있을테다. 아, 이걸 빼먹었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경험.

사랑해선 안 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쉽게 떠오르는 건 애인/배우자의 유무이다. 만약 당신이 배우자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답답한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는다고 하자.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사랑은 본능적인 거다, 멈출 수가 없다,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친구가 한마디 한다. “안 되는걸 알면 접어야지. 본능대로 살면 여기가 동물의 왕국이게?” 당신은 (나름대로) 반박하고 싶지만 입을 다문다. 그리고 고민이 시작된다. 더 밀고 나가볼지, 여기서 끝낼지.

1962년 홍콩,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 초 모완과 수 리첸이 있다. 서로 사랑하니 잘 된 일 아니냐며 축하의 박수를 치려한다면 잠시 멈췄으면 한다. 서로 사랑하는 일이 무조건 박수 받을 일이라면 우리의 사전엔 ‘불륜’이라는 단어가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차 모완과 수 리첸에겐 서로 배우자가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미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이다.

(출처:네이버 영화)

우린 그들처럼 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 - 수 리첸

차 모완과 수 리첸은 서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그 핸드백 어디서 샀나요?”, “그 넥타이 어디서 샀나요?”. 그들은 수 리첸과 차 모완 아내의 핸드백이 같음을, 차 모완과 수 리첸 남편의 넥타이가 같음을, 자신들의 배우자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배우자의 부재는 외로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부재를 메울 존재를 찾는다. 홧김에 시작된 관계일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절대 과속하지 않는다. 좁디 좁은 아파트 복도를 지나치며, 국수를 사러 가는 골목을 지나치며, 닿을듯 말듯 서서히 거리를 좁힌다.

1960년대이든 2010년대이든, 불륜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며 떳떳하기 힘든 만남의 형태이다. 사람들이 세워놓은 도덕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대일 사랑이 사랑의 완성형이라고 생각하며, 그 외의 형태는 아무 감정없이 받아들이기 쉽지않은게 사실이다. 수 리첸의 대사 “우린 그들처럼 되지 않아요.”는 미완될 사랑을 암시한다.

(출처:네이버 영화)

모르죠? 옛날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했다 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 차 모완

결국 헤어지게 된 두사람, 차 모완은 싱가폴로 떠나고 수 리첸은 가정에 돌아가고자 노력한다. 시간이 흐른 뒤, 차 모완은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와트의 구멍에 자신들의 사랑을 봉한다. 여태껏 자신의 가슴에 품어왔던 사랑을, 남들의 눈에 들킬까 두려웠던 사랑을,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사랑은 미완으로 남았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남긴 미완성된 작품을 두고 아쉬워 하면서도, 그 매력에 빠지기도 한다. 찰스 디킨스의 유작이면서 미스테리 미완성 소설인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 매년 영국에선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 해결 국제 콩쿨’이 열린다고 한다. 독자들이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작품을 마무리 짓는 이벤트인 이 콩쿨은 소설을 매번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하나의 미완된 소설은 수많은 완결된 소설을 낳는다.

그리고 구십 세의 미켈란젤로는 죽기 며칠 전까지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조각했다. 한번도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본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검색을 해보길 바란다. 얼마나 사실적이며 정교한지, 얼마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조각하는지 꼭 보길바란다. 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들은 사실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으로 변하고, 끝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작품을 보는 우리에겐 더이상 미완성은 중요하지 않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주는 감동은 여전하니까. 미켈란젤로는 미완성으로 조각을 완성했다.

우리는 미완된 작품에 대해서 말을 아끼지 않지만, 미완된 사랑에 있어선 말을 아낀다.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출처:네이버 영화)

-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화양연화’,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 하지만 차 모완과 수 리첸에겐 역설적으로 가장 힘들고 아팠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희미하게나마 누군가를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아무것도 없는게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미완된 사랑은 어쩌면 완성된 사랑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지 않을까.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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