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지려면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관계하지 말아야한다 / 알베르 까뮈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이제야 비로소 솔직한 나의 심정을 고백하려고 한다. 이 고백을 받을 사람들은 나에게 ‘친하게 지내요’라고 말했던 사람들 중 일부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받아봤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말은 몇 번 안 들어봤음에도 나에게 커다랗고 무겁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3월이 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아주 가볍게 말하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가벼움은 더욱 가벼이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성인이 되고 몇 년 후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과는 대부분 친해지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들이 누구였는지조차 대부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또 그중 일부는, 정말 나의 머릿속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그래, 나 따위의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런 존재가 되었다 치더라도 당신 인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고 별로 상처도 받지 않을지 모른다. 당신은 그저 내가 그런 말을 바랄 거라고 생각해서 인사치레로, 혹은 오랜만에 마주친 동창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처럼 던진 말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또 누구는 이렇게 말하더라. ‘친하게 지내요’라는 말에 내가 너무도 건조하게 ‘네’라고 대답하니, 그 이유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그가 바라 본 나라는 사람이 굉장히 흥미로워보여서 나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다고. ‘나’는 당신과 굉장히 다르게 사는 사람 같아 보인다고 했다. 맙소사. 난 이 말을 듣고 정말 가슴에 큰 멍이 든 것처럼 상처를 받았다. 사람이 어쩜 그리도 폭력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극도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나의 감정은 이러했고, 지금도 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똑같이 느낄 것 같다. 물론 그가 나와 어떤 교감들을 이미 나눈 후라면 다르겠지만.

왜 내가 이렇게 생각했느냐. 왜 그가 일방적이라고 느꼈는가.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움을 느끼고자 했다. 그는 나와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내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어떤 환경에 자랐으며,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런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듣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 내가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난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와 함께 있다는 친근감? 나의 일상에 대한 그의 리액션과 소감? 혹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 미안하지만 난 그가 궁금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나의 에너지와 시간, 어쩌면 그저 ‘나’를 소비하는 사건이 될 만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그는 머릿속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요구란 말인가. 심지어 여기에 대한 대답은 ‘싫은데요?’라고도 할 수 없다는 거다.

그의 작품은 물론이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영화감독님이 하루는 나에게 햄버거를 먹자고 하셨다. 감독님과 안지 오래된 사이지만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감독님은 나에게 ‘네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니? 난 어떻게 너의 이런 성격이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너무 궁금하다’라고 하셨다. 그때의 내 감정은? 몹시 기뻤다!

감독님은 그의 작품과 더불어 수많은 영화, 드라마, 문학 작품을 봐오셨을 거다. 그런 그의 눈에 ‘나’라는 사람이 독특해 보였다는 게 우선 기분이 좋았다. 그 독특함이 긍정적인 의미일지 부정적인 의미일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궁금하다’는 자체가 나에게 영광이었다. 그가 유명한 감독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보아 온 그가 매력적인 사람이라 그러했다. 

그런 사람에게 ‘궁금함’을 유발시켰다는 사실이 날 흥분시킨 거다.또 나 역시도 궁금했다. 결국 내가 살아온 것을 이야기 한다는 건, 나의 환경 30%, 그리고 60%는 나의 선택들, 나머지 10%는 우연성이었다. 내 선택에 대한 그의 리액션도 몹시 궁금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우리의 작은 선택에 의한 덩어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아는 사람은 많지만 친한 사람을 사실 별로 없다.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가는 곳만 간다. 다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람 많은 자리도 꺼리는 편이고, 무엇보다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편이라 불편한 자리는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직업 특성상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사회생활’을 정말 못한다. 정말 애 같다. 이 칼럼을 쓰는 신문사 이외에 따로 작업을 하는 대행사나 잡지사의 담당자 분들과도 몇 달씩 같이 일을 하면서도 서면으로 의견과 원고를 주고받을 뿐, 서로 얼굴 본 적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과는 유독 두텁게 지낼 수 밖에 없다.

내가 친한 사람들이 사계절보다도 급변하게 변하는 걸 느낀다. 내가 가까이 지내는 한 인간의 마음도 매일 다르고, 환경 역시 변하기에 우린 서로를 찾기도 한다. 내가 어제의 그를 알면서도, 오늘의 그를 모를 수 있다. 단지 어느 정도 그의 본질을 알 뿐이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나 역시도 ‘나 다움’을 잃지 않기 위하여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오래된 친구의 매력이 그런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에게 ‘친하게 지내자’는 친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네 이야기가 궁금해!’라면서 맥주 한잔을 사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맥주 한잔 사마실 돈은 나도 있다. 지금도 나의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맥주 값을 벌고 있잖아?

‘친하다’는 것은 가까이 사귀어 정이 두텁다는 뜻이다. 정이란 무엇인가, 정은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다. 가까이 사귀면서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 두터워진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친해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렇게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들이 두터워진 관계에 놓여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공유하는 마음과 감정 상태가 비슷해지고, 무엇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넌 이런 사람이구나’ 인정을 하는 관계가 되면 친해진다. 

그리고 내가 ‘친하다’라고 느끼는 사람들 역시, ‘이 사람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친한 거다. SNS에서 봐온 나의 모습이 전부인 사람에게 굳이 날 소개하고 싶은 생각일랑 없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게다가 정말로 내가 그렇게 ‘독특한 사람’이라면, 날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겠는가? 누군가가 덧셈, 뺄셈인데 내가 나눗셈, 곱셈 같은 아이라면 말이다.

20대 초반에 포기한 것 중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거다. 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해도 된다는 거였다.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이다. 왜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평가하는지 모르겠다. 타인의 노력이나 재능, 외모, 행운에 박수를 쳐주지 않고 질투하고, 악담을 하며 심지어는 제 3자에게 ‘그것’을 몹시 부정적인 행위로 얻은 것이라 말을 지어내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며 ‘사람’에 대한 기대를 많이 안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느꼈다. 사람들과는 ‘적당히’ 지낼 필요가 있다고. 

재밌는 건 이렇듯 다소 심플하게 생각할수록 어떤 인연들은 더욱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캐주얼하게 누군가를 대하고 헤어지더라도, 이상하게 만날 사람들은 꼭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렇게 같은 시간을 아주 가벼이 공유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같은 것들을 교감하게 되고, 추억이 생기고,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 생긴다. 굳이 열정적이고 피곤한 자기소개가 없더라도 서로가 어떤 사람인 지 알게 된다. 상대방이 흥미로운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그와 공유하는 시간, 함께 장식하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 일 것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중에서)

알베르 까뮈는 ‘행복지려면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관계하지 말아야한다’라고 했다. 그 말이 참말이다. 우리는 관계들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한다. 왜 당신은 지금도 할 일이 그리도 많은 피곤한 사람이면서 굳이 더 많은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

‘나’라는 불안전한 사람이 앞으로 살면서 남에게 질책 받은 일을 했다고 치자. 나의 친구들은 침묵으로 내 옆에 있어주던지, 아니면 최소한 나의 편을 들려고 할 것이다. 나의 그런 선택을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다. 하지만 나를 ‘조금’안다는 이들은 주변에 나에 대하여 이렇게 떠들겠지.
‘내가 걔를 조금 아는데, 걘 어쩐지 그럴 싹수가 보이긴 했었어.’

친한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건 환영이다. 친한 친구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 나를 보여줄 수 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나’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친구도 어쩌면 또 하나의 ‘그’일 수도 있으니까.

요즘 사람들은 ‘인맥 모임’같은 걸 많이 하는 것 같다. 종교나 봉사, 스터디, 운동 목적이 아닌 그저 ‘인맥’을 위한 모임들 말이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건 안 그래도 삭막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를 더욱 삭막하게 만드는 말 같아서. 결국 ‘너와 나’ 사이에 서로 사회적으로 도움 될 만한 게 있는지 먼저 따져본다는 거 아닌가. 하긴, 요즘은 결혼도 그러한 사회적인 계약이 되어버렸으니.

한번 뿐인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끝끝내 기억해낼 만한 시간들은 많지 않다. 영광의 순간들, 슬픈 순간, 혹은 자다가도 ‘이불킥’을 할 만한 사건들! 영광의 순간이외에 이불킥할 만한 사건들을 함께한 친구들은 정말 잊지 못한다. 그 시간들 속에 그들은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의 특성상 너무도 많은 나의 이야기와 나의 소감들을 공개해야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 사람만나는 게 두려워진 것 같다. 나만 발가벗겨진 느낌이라서. 그래서 나처럼 자신의 느낌이나 스스로를 표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잘 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빠와 내가,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독 친하게 지내는 이유도 그 중 하나다. (아빠는 사진작가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린 천륜으로 이어진 하나의 팀이 아닌가! 아빠만큼 나에게 완벽한 친구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니 자꾸만 아빠와 시간을 더욱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와 공유하는 일상이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또 그러니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나의 오래된 친구 중 하나는 안타깝게도 나와 일상이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요즘 자꾸만 들게 한다. 그게 너무 슬프다. 나도 겨우 내 앞가림할 정도로 돈을 벌지만, 그는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간다. 이게 오래 지속되다보니 우린 함께 공유하는 것들이 조금씩 줄어간다. 당연히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예전보다는 비교적 적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 나머지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지갑이 두터운 편이다. 난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싶다. 영광의 순간, 슬픈 상실의 순간들, 이불킥의 순간, 그리고 진부한 일상 역시 함께이고 싶다. 그들보다 앞서거나 뒤에 서지 아니하고 함께 발맞춰 걷고 싶다. 그래서 돈을 벌고 싶다. 우리의 두터워진 정이 너무도 따뜻하기 때문에 이런 욕심이 생긴다.

‘소통해요’라는 말은 알고지내고 싶은 사람, 더 나아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다. 그건 같은 직장에 있는 상사 또는 정치인에게 해야 할 말이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은 이미 자주 보고 있는 사이라면 괜찮은 것 같다. 이미 가깝게 지내려는 단계에 놓여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외에는 별 소득 없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어느 방송에서 스님이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 역시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대접한 식사더라도, 상대방에게 이 음식이 맛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맛있게 먹으라는 건 좀 일방적이지 않나. ‘친하게 지내요’ 역시 그러하다.

너무 예민하고 건방진 태도로 글을 쓴 걸 알고 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정중하고도 가벼운 사과를 하고자한다. 하지만 나의 인간 관계론이란 이러하다. 당신이 알고 싶어 했던 나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친분’이란 이러하다. 별거 아닌 ‘나’는 이렇게 건방지며, 우물 안 개구리마냥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람이다. 싫어하려거든 싫어하시오, 그리고 더욱 궁금해 하시려거든 더욱 많이 내 글을 읽어주시오! 어쩌면 나의 ‘현재의’ 생각들을 공유했던 우리들은, 마주친 적이 없더라도 서로의 영혼에 따뜻한 수프 같은 친구일 지도 모르니까. 언젠가 마주칠 인연이라면 우린 만나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억지로 애쓰진 말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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