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왜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오래된 생각이 두렵다. / 존 케이지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왜 나는 자꾸 사서 욕을 먹는가. 왜 자꾸 사서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가. 왜 자꾸 사서 비호감을 얻는가. 가만 보면 나도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적당히 웃고 넘기면 될 걸 말이다. 남들 하는 만큼 그렇게. 근데 그게 되질 않는다.
막 싸움을 거는 성격은 아니다. 연애할 때 이외엔 누구랑 말싸움을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심지어 연애한 지도 꽤 되었으니 한동안 정말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거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관계에서의 싸움은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가치관이 달라 이해의 차이가 있을 때. 나는 어떤 사람들과는 싸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저 사람과는 가치관을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거다. 그래서 누군가와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유를 말하지 않고 연락을 끊은 적도 사실 여러 번 있었다.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르구나, 그리고 끝. 좋지 않은 행동임을 안다. 근데 사실 귀찮아서. 말하기도 그렇고, 변명이든 이유든 그걸 듣는 것도.
나는 싸움은 안 걸지만 아예 마음에 안 들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괄시하진 않는다. 그냥 신경을 안 쓴다는 뜻이다. 그냥 좀 적당히 예의를 차리면 되는 데 왜 그게 안 될까.

근데 글을 쓸 때도 그 성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나도 적당한 글을 왜 못 쓰겠는가. 적당히 뭐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꿈을 가져야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해야 되고, 현실이 어렵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그러면서도 이웃을 챙기고……. 이런 진부하고 식상하고 건강한 이야기를 나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계발서? 난 안 읽는다. 나라는 인간이 잘 나가서가 아니라 그 책을 쓴 사람의 인생도 안 궁금하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도 안 궁금하기 때문에. 사실 난 ‘자기계발’ 만큼 오히려 쉬운 장르의 책이나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어렵지, 이런 글이나 기사는 쓰기에 어렵지 않다. 심지어 자기계발서는 더 더욱. 인기도 어마어마하다. 망하는 법이 없다. 근데도 난 관심이 없다. 혹시나 남들 보기에 잘난 인간이 돼서 누가 그런 걸 만들어보자고 해도 안할 것 같다.

난 종종 강연이나 강의를 나갈 때가 있다.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청중을 모신다. 사실 거기서도 ‘적당히’해도 될 수도 있다. 그저 ‘작가’라는 직함과 어느 정도 기대한 바에 미치는 수준으로만 이야기하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또 적당함을 지키지 못하고 튀어버리고 만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되고,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안 해도 좋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이 나쁘고 잘못되었다고 쓴다. 또 어떤 것은 무시한다. 그걸 가치 있게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나는 저격의 대상이 된다. 안 해도 될 걸 또 그리 사서 욕을 먹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관심종자가 아니냐 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그래, 무관심보다야 악플이 낫지! 라면서 스스로 자극적인 코드를 찾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관심 유무를 떠나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것을 불호(不好)하던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관심을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호불호가 갈리지 않으면 안하겠다는 거다.

우연히 SNS를 하다가 어떤 여성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나를 팔로우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나보다 훨씬 활발히 강연을 다니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SNS에 자기 색깔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오히려 궁금해졌다.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유튜브 그 분 강연 영상 몇 개가 있었다. 그중 가장 긴 강연 하나를 보았다. 아니 틀어 놓았다. 보고 나서 든 생각?
‘도대체 저렇게 강연하고 얼마를 받는 거지?’ 정말 ‘뻔한 말 대잔치’였다.

그 분 SNS에 아무 색깔도 없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분 강의를 보는데 저건, 굳이 저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무나 똑같은 얘기를 Ctrl+C 해서 Ctrl+V 할 수 있을만한 내용들이었다. 직업군과 나이, 생김새가 다른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만한 아주 당연한 내용들을 더 자기 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심지어 감정에 호소해가며. 그래서 심지어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많은 강연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내용이 통하지 아니하는 세대가 없으며, 게다가 내용이 꽤 건강한 편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호불호가 엄청 갈리고 누군가는 그 말 한마디에 꽂혀서 줄곧 잡고 늘어지며 나를 피곤하게 한다. 그래, 나도 귀찮은 것 싫고, 예민한 주제로 글 쓰는 건 겁도 나고, 칭찬만 듣고 싶다. 그녀처럼 말이다! 아, 인생 저렇게 쉽게 살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 사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런 강연을 또 계속, 찾아서 듣는 사람들이다. 나는 정말 궁금해서 처음 봤다지만 이런 강연의 수요(?)가 꽤 있더라. 그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음악이든, 책이든, 영화든 많이 팔린 게 무조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건 아주 별개의 문제니까. 그 말은 많이 팔린 것 중에서도 별로인 게 꽤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아주 주관적인 관점이다. 그 중에 하나가 얼마 전 읽은 책이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씩 인문학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회원 한분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있었다. 외국 에세이였는데 알고 보니 그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인기가 있던 책이었다. 우리 스터디 모임 자체가 베스트셀러나 쉬운 책보다는 일부러 ‘불편한 책’을 읽고자 하는 취지였는데, 그 주의 모임은 정말 완전 망했었다! 나 뿐 만이 아니었다. 모임에 모인 회원들 모두 도대체 왜 이렇게 뻔한 책이 잘 팔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우리끼리 내린 결론이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평소에 엄청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일 거라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하기 위해서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연상하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근데 그러한 뻔한 내용의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무엇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강연은 더욱 그러하다. 나 역시 강의나 강연을 즐겨 보는 편인데, 내가 강연을 보는 이유는 이러하다. 대부분 우리가 알만한 저명한 철학자나 소설가에 대한 해석이 모두가 다를 수 있어서다. 왜냐하면 이것들 모두가 번역에 번역들을 거친 것들이다. 철학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반박에 반박이 더해져서 발전되어 왔다. 앞선 누군가의 견해에 토를 달고 비판하며 여기까지 온 것들이다! 나는 내가 신뢰할 만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 해석하는 니체와 톨스토이가 궁금해서 강의를 본다. 내가 아는 니체와 그가 아는 니체가 다를 수 있다. 또는 내가 오해한 니체가 있을 수 있다. 또는 그가 아는 니체도 완전 엉터리이거나 오해일 수 있다. 어떤 저명한 철학자들은 땅 속에 묻혀 ‘내 말은 그게 아니라고! 헛소리 집어치워, 이 악마야!’라며 나가지 못해 악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석할거면 차라리 자기 책을 읽지 말라며 땅 속으로 도로 갖고 들어오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가 옳고 그른지 보다 중요한 게 있다. 다각도적인 시선에서 어떠한 개념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 그 시도가 중요하다. 그게 심지어 데카르트나 니체가 아닌 동네 아저씨의 개똥철학일지라도.
철학, philosophy의 어원을 풀자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알고자하는 노력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스마트한 뇌를 가장 맛있게 쓸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 근데 책은 뭐 습관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강연 역시 이렇게 당연한 ‘뻔한 말 대잔치’를 볼 거면 도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산다는 거란 말인가! 아, 이것 봐라 난 또 엄청 불친절한 글을 써서 욕먹을 각오를 다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뻔한 강의나 책의 수요는 줄지 않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점점 생각하기 싫어질 테니까. 점점 더 간단한 것들을 찾을 것이다. 깊게 사유思惟하려 하지 않겠지. 누군가는 이렇게 예상했다. 앞으로 미래 사회에 사람들은 인문 철학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왜? 산업사회보다 발달된 과학 기술로 인간들의 여가 시간이 더욱 많아질 테니. 아니, 전혀. 정말 모르는 말씀이시다!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하여 노동을 하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그럼 왜 일을 하냐고? 당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살려고 돈을 버는 거다. 먹고 살기 힘들다, 라고 하는 말은 사실 다 거짓말이다. 더 잘 먹고 더 잘살고 싶어서 힘든 거다. 저 사람을 이기고 계급을 얻으려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들은 더욱 바빠질 거다. 내 옆에 부자들을 두고 발맞춰 걷고 싶을 테니까. 나 때는 중학교 때부터 바빴지만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바쁘다. 나보다 바쁜 것 같다. 이제 봐라, 앞으로 몇 살부터 인생을 정신없이 살게 될지. 그럼 사람들은 더욱 생각다운 생각을 하기 싫어질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은 ‘자기 발전’이라는 식으로 취미로 독서를 꼽으며 저런 뻔한 책을 읽고, 강연을 볼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하겠지! 아주 발전적인 행위를 했다고. 보면서 아주 생각도 안하고 있었으면서, 아주 수동적으로. 아니, 그럴 거면 차라리 게임을 하거나 술을 진탕 마시는 게 낫다고 난 생각한다. 그게 차라리 자기 주도적인 습관이며 스트레스 해소에 더 도움 되지 않을까?

아, 심지어 내가 엄청 즐겨듣는 <너무 깊이 생각 하지마>라는 제목의 김광석 노래는 너무도 철학적인 가사인걸!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이래서 내 칼럼은 인기가 없나보다. 내 글들은 대부분 극단적이다. 때로는 엄청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해수의 개똥 논리, 개똥 철학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날 엄청 좋아하고 누군가는 욕을 한다. 내 글을 읽으면 ‘이게 좋은 내용이구나’보다는, ‘내가 이 의견에 대하여 찬성하나 반대하나’ 생각하게 된다고들 한다. 그래, 근데 난 차라리 이게 좋다. 나라는 인간의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한번쯤 무언가에 대하여 생각이라도 해보는 게 어디인가. 심지어는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문제에 대해서라도 말이다. 난 얼마 전에 예술가와 엔터테이너의 차이에 대한 칼럼을 쓰고 스스로 뿌듯했다. 누군가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준 거다. 그런 차이에 대하여 어렴풋이 궁금해본 적은 있지만, 굳이 검색을 하거나 누군가와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고. 근데 내 칼럼 때문에 그걸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정리해보는 시간이 있었다는 게 유익했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도 나는 검색창에서 ‘핫’한 키워드를 가지고 글을 쓸 게 아니라, 음지에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글을 써야 되는 것인가........ 조회 수가 평범한 칼럼니스트로서 나를 낮추고, 음지의 그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인가....... 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더 유명해져야겠구나. 에잇, 그러려면 최소한 존재감이라도 기억되게 계속 호불호가 갈리는 글을 써야겠구나!

확실한 건 애매하고 뻔한 말을 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아니한 사람의 것들이 잘 기억된다는 거다. 사실 내가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왜? 그렇다면 난 니체는 왜 좋아하는가? 니체야 말로 ‘이렇게 살라’고 아주 광범위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마치 굉장히 신神적인 말투로 말이다. 난 니체가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살면 엄청 소외되거나 혹은 주변에서 ‘보헤미안 납셨네 훗’이라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니체는 친절하지 않고 착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극단적이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렇게 말하는 지 쫓다보면 심지어 꽤나 논리적이라는 거다! 그는 날 엄청 생각하게 만든다. 자꾸만 궁금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가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의견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말 생각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거다. 그러니 뻔한 자기계발서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지.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던 데카르트.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렇게 다시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양보다 질을 이럴 때도 따지자는 겁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1년에 한두 권을 읽더라도 책다운 책을 읽자. 정말 한 문장 한 문장 투쟁하듯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자. 한국말을 하는데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몇 번씩 돌려 봐야하는 강의를 보자. 그게 더욱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며 훨씬 쓸모 있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굳이 대인관계를 위하여 술자리에서 아는 척 하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치더라도 남들 다 아는 내용보다야 그게 낫지 않을까. 이거야말로 제대로 쉬고 제대로 사고하는 게 아니겠는가!

난 계속 음지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탐닉하고, 불친절하며 호불호가 갈리는 글을 쓸 생각이다. 조금이라도 계속 이런 것들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반박당하고 옹호당하고 비난받거나 박수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나도, 우리 스터디 모임에서 다루는 훌륭하고도 ‘불편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쉽게 살 수도 있겠지만 난 더욱 생각하며 살 것이다. 아, 심지어 다채로운 반응들은 쉽게 살지 않아야 얻는 거 아닌가. ‘그분’들 강연의 리액션엔 박수뿐이겠지만 최소한 내 강연에는 다양한 표정들이 수놓아져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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