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수록, 그것이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위대한 개츠비> (스콧피츠제럴드 작) 중에서

[공감신문] 며칠 전 우연히 <제 53회 백상 예술대상>에서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는 배우 공유 님의 영상을 보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아직 드라마 <도깨비>를 한 편도 못 봤다. 곧 정주행 할 생각이었는데, 그의 수상소감을 듣노라니 그런 마음이 굴뚝같아 졌다. 정말 그 마음이, 뜨겁게 느껴져서다. 그러던 중 함께 그 자리에서 수상소감을 듣던 다른 배우들의 표정이 사뭇 왜 저렇게 아련하고 더욱 뜨거워 보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하나, 하나 그 시상식 클립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제가 되고 있는 배우 33인의 합창 영상까지……. 난 마치 감동적인 영화한 편을 보고 난 듯한 감정까지 느꼈다. 맙소사, 시상식을 보고 이런 기분이 들다니 정말 묘했다.

(눈물의 소감을 전했던, 제 53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공유)

왜 이 시상식이 남다르게 다가왔던 걸까. 사실 시상식들의 체면(?)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로 대종상 영화제(이하 대종상)와 부산 국제 영화제가 있다. 국내 최장수 영화제였던 대종상은, 정작 영화인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영화제에 참가하지 않는 배우에겐 상을 주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나 상 몰아주기 등은 일반 대중들의 비난 역시 피할 수 없게 했다. 명실 공히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였던 부산 국제 영화제(이하 부국제) 역시 예전만큼 ‘핫’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부산의 분위기 자체가 이전과 다르다. 수많은 정치적 논란 속에서 영화인들은 그들의 축제였던 부국제를 지켜내고자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저명하진 않지만 나름의 고유성이 있는 영화제들이 있다. 레드 카펫이 깔리고,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못 알아볼 것 같은 배우들이 그 위를 수놓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배우의 얼굴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그것을 안다. 그녀는 이 때다 싶어서 온 몸에 살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그 옷은 속살이 궁금하라고 만든 옷들이다. 그녀가 여배우로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옷들이다. 칭찬 받고 축하받으러 온 게 아니라, 아주 단순한 한 가지 욕망의 대상이 되려온 듯 한 느낌까지 준다. 연기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이었다니.
아, 몇 년 동안 영화제들은 다- 이런 건 절대 아니지만 이런 적들도 꽤 있어왔다.

그 시상식을, 그 축제를 지켜보던 대중들은 물론이요 거기에 참석하는 아티스트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우선 그 자리에 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겠지만, 일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백상 예술대상(이하 백상)을 보면서는 단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백상은 정말 저들을 위한 축제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시청자들까지 울린 배우 유해진과 천우희의 진심이 담긴 눈물)

한편으론 대중을 배려하지 않고 너무 자기들 위주로 흘러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아티스트 중심이었다. 그래서 진짜 ‘힐링’이 있었나 보다! 그래, 그들 중심의 축제여야 맞는 것 같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 뿐이다. 그 자리에 주인공이던 그들은, 모두가 완벽하게 그 순간에 몰입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 배우가 수상을 할 때, 거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쳐 주고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울고 웃었나보다. 그 자리에 있던 배우들은, 작가들은, 감독들은 아마도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단언컨대 아마도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 열정으로 작품을 만들 것 같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는, 우릴 위한 축제나 파티를 즐겨본 것이 언제인가.

이런 저런 문화 행사가 꽤 많다. 위에서 언급한 부국제처럼 영화 행사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음악이 있는 축제들이 역시 뜨겁다. 나 역시 작년에 UMF(울트라 뮤직 페스티벌)나 서울 재즈 페스티벌 등을 다녀왔었다. 그래, 그런데 이건 주인공이 아티스트 위주인 축제다. ‘나’, 혹은 ‘우리’를 위한 축제나 파티는 언제였나. 그게 있긴 했을까?
아마도 우리가 앞으로 즐길, 혹은 누군가는 즐겼던 파티 중에 가장 ‘역대급’이 될 만한 건 아무래도 총각파티, 처녀파티가 아닐는지 싶다. 재작년 알게 된 친구들이 떠오른다. 나에겐 대만 국적의 남자 사람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대학 시절 미국에서 함께 유학한 홍콩, 중국 출신의 친구 9명이 있었다. 그 무리 중 한 친구가 곧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친구 포함 중화권 남자 10명의 무리들은 총 10개국을 돌며, 팝스타 스케줄을 방불케 하는 총각파티 투어를 하는 게 아닌가! 그 마지막 행선지가 바로, 한국이었던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10명이 모두 함께 한국에 왔었어야 했지만 겨우 7명만 간신히 왔던 기억이 있다. 당시 메르스 때문에 온 나라가 비상이었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자신들은 거의 목숨 걸고(?) 놀겠다며 이 사람 많은 대한민국 클럽에 왔는데 마스크 끼고 일하는 직원들 때문에 놀 기분이 확 줄어든다며 투덜거리던 그들의 표정……. 엄청난 외화를 쓰고 갔기에 나 역시 그건 좀 미안하다 싶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죽어라, 부어라, 마셔라 했던 걸까. 총각 파티, 처녀 파티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사형 선고’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서다. 친구를 군대에 보내는 것 보다 심하다. 기약이 없다. ‘주인공’을 위한다는 친구들이 사주는 술은 축하주가 아니라 위로주다. 화려한 샴페인을 시켜주며 이런 표정을 짓는 거지, ‘넌 이제 X됐어.’…….

‘나’, ‘우리’를 위한 파티나 축제가 정말 드물다는 것이다. 축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어떠한 의미를 상기시키고 결속력을 다지거나 무언가를 기념하는 행위이다. 사실 성일聖日을 뜻하는 단어의 어원에서 출발한 ‘Festival’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축제를 보는 데에 크게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축제가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며 사회 통합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보았다. 한편 정신 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의 시선은 달랐다. 축제를 통하여 우리는 디오니소스(바쿠스)적인 욕망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억압된 것들을 이곳에서만큼은, 서로의 합의하에 내려놓는 것이지!
현대인들에게 ‘축제’의 의미가 남달라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시다시피 현대 사회 시민들은 여기저기 너무 보는 눈들이 많기에 눈치 볼 것 투성이고, 복잡한 사회엔 규범도 많으며 정말 피곤하게 살기에. 그러니 그런 속세(?)에서 벗어나 나를 돌보고 적당히 일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되어 철저히 즐기면서 말이다.

(<바쿠스 축제> / 피터 폴 루벤스 1611-1615)

작년 겨울, 난 광화문에서 열린 ‘문화제’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문화제’에서 우리는 한 마음으로 ‘하야’라는 단어를 외치고 촛불을 들었었다.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보고, 누군가는 무대에 올라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행사가 끝난 후 근처에서 맛있는 걸 먹었다.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었지만 그건 분명 문화제였다. 엄마 아빠들은 아들 딸의 조그만 손을 잡고 나왔다. 아이들의 표정 역시 밝았다. 놀랄만한 인파가 모여들고 우린 거기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다들 뜨겁게 정의를 원하고 있노라고. 왜 거기에 ‘문화제’라는 이름이 붙는 지 가본 사람들은 안다. 폭력적인 ‘시위’? 그런 분위기가 결코 아니다. 나중엔 하도 많은 인파가 몰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가 ‘하야하라’를 외치면 모르던 옆 테이블 사람들도 함께 건배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런 ‘축제’같은 성격을 띤다고 진정성까지 무시하진 마시라. 따뜻한 집 TV앞을 놔두고, 그 추운 겨울날 지방에서 거기까지 온 발걸음들엔 정의를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오래 거주하셨던 목수정 작가님의 강연을 보다가 재미있는 얘길 들었다. 프랑스에서 심심할 때마다 매일 집회에 놀러 가셨다는 것이다! 그게 어떠한 집회든 말이다. 어떤 집회는 소방관, 어떤 집회는 출판 노조, 어떤 집회는 요리사, 어떤 집회는 학생!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다양한 직업군의 집회를 가셨다고 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거기에 가면, 그들의 입장을, 그들의 목소리를 가장 명확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거다. 맞는 말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아마도 그들이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폭력적으로 번지는 시위가 아닐 거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 역시도 어떠한 일종의 ‘문화제’일 지도.

( 프랑스 69혁명, 우드스탁)

시위하자!, 뭐 이런 게 아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무언가를 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태원2동, 요즘 힙!하다는 그 경리단길에 살고 있다. 5월이니 벌써부터 동네가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이번 연휴에는 정말 동네를 돌아다니기 꺼려질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더라. 곧 몇 주 후면 동네 옥상들은 낮부터 루프탑 파티(rooftop party)를 열 것이다. 나는 요즘도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친해진 모르는 사람들과, 거의 10명 이렇게도 모여서 그날 바로 어디 한군데를 빌려놓고 파티를 즐긴다. 정말 즉흥적이다. 난 가끔 SNS로 이걸 라이브 방송 한다. 신기하게도 이 파티를 재밌다며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 우리가 진짜 아무생각 없이, 아무런 계산 없이 즐거워보여서 그런 걸 거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을 풀고 있던 걸 수도 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축제였다. 우린 순수한 몰입을 통해 즐거움 하나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왜? 재미없어지면 집에 가면 그만이잖아. 그러니까 정말 재밌던 거였다.

인간들은 오랜 시간 ‘축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다. 몸 속 DNA 심어진, 그건 외면하려야 할 수 없는 태곳적 욕망인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태어난 이유는 축제나 파티에서 눈이 맞은 부모님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festival 즉 성일 聖日에 어여쁜 아이를 원하며 기도하던 어머니 때문일 수도 있다.
축제의 주인공이 되시라, 주인공이 되는 파티가 가시라. 혹은 그런 일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이 되시라는 거다. 쓸데없는 것 같다는 그 생각이 쓸데가 없다. 이번 백상을 보며 감동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가운데로 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빠지면 파티가 아니지’라는 기분으로! 그날만큼은 ‘소란스러운 자’, ‘근심을 덜어주는 자’, ‘위대한 사냥꾼’, ‘풍요의 상징’, ‘부활의 신’이라 불리는 디오니소스를 영접해보자.
누군가 굉장한 몰입을 느끼면 ‘몰아일체’를 경험한다고들 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몰입의 달인이었다. 인생에 있어 몰입은 최고로 경제적인 활동이며 최고의 가치를 선물한다. 그러한 몰입은 주인공들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두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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