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것들만이 오로지, 대단한 허무함을 겸비한다.

[공감신문] 인생이 동화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다. 동화에서는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른다. 부모님, 하나님, 선생님, 그 세계관 속 선한 일 혹은 그런 이의 말을 따른 주인공은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동화 속 주인공들은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하고 멍 때리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굴지도 않는다. 그들의 인생에서 허무함을 분비할 일이 없을 테니까. 심지어 그 어려운 사랑도 노력하면 얻어지니 말이다!
얼마 전 TV에서 그런 동화같이 찬란하고 알록달록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모자이크가 되어있어서 그 얼굴을 잘 들여다볼 순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뿜어내는 감격의 아우라가 엄청났다! 목소리 역시 순도 100%의 희망과 소망이었다. 거기선 아무런 허무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소개된 어느 사이비 이단 종교 모임의 집회 장면이었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집안에 교회 관련 일을 하시는 분이 계셨으며, 아주 보편적인 성경 말씀을 듣고 자랐다. 그러던 중 ‘이단’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이런 보편적인 성경도 상당부문 이해가 힘든데, 이단이 말하는 성경은 도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며 거기에 왜 빠지는 지 궁금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때 집에 혼자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아줌마 두 분이 서서 좋은 말씀을 들어보겠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이단이다!’라는 느꼈다. 반가웠다.
‘할머니가 절대 낯선 사람 문 열어주지 말라고 했는데…….’
허나 10살의 맹랑했던 나의 호기심은 어느새 그녀들에게 주스를 대접하고 있더라. 빨리 힘내서 나에게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며!
그녀들은 나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소개했다.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였다. 그 하나님은 새로 오신 구세주로, 한국에 사신다고 했다. 정말 놀라웠다! 요한계시록에 다시 오신다는 메시야가 같은 한반도에 거주하고 계셨다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 세계에 가장 많은 메시야들이 한국에 사신다더라, 훗. 어쨌든 나는 그녀들의 말이 정말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고, 때 마침 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된통 혼이 났고 그 자린 그렇게 마무리 됐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난 그런 미지의 세계(?)에 관심이 많아서 유튜브를 적극 활용했다.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를 통하여 수많은 이단의 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이단들의 포교 활동은 예전처럼 가정 방문을 넘어 e-learning으로도 가능해졌다. 정말 많은 이단 교리를 살펴보았는데, 그럴수록 강해지는 의문은 단 한가지였다. 정말 그것이 알고 싶더라.
‘도대체 왜, 저 딴 헛소리에 빠지는 거야?’

그들의 말이 왜 헛소리 같았냐고? 내가 아는 성경만 오직 진리라고 믿어서 그러냐고? 아니다. 그들의 말 속엔 오직, ‘보상’만이 가득했다. 삶은 쉬운 것이 아니다. 신을 섬기는 것이 로또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그들 말에 따르면, 온갖 감미롭고 화려하고 온화한 것들이 그 메시야 곁에선 쉽게 가능했다. 옆 동네에 살고 있는 그 메시야만 만나면, 이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을 것처럼 소개했다. 그게 문제라는 거다. 최소한 신밧드는 목숨 걸고 모험이라도 떠났기에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엔 최소한의 모험도 없었다. 너무 쉽고 간편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만19세를 넘은, 수능 시험이라도 치러 봤을 어른들이 이런 것에 빠지다니? 아, 정말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아니구나.

왜 이렇게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하는가. 절대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어려우며, 심지어 때로는 절망적이다. 노력하는 것도 어려운데, 심지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책을 썼던 사람이 그러더라. 그는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공부가 제일 쉬운 이유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오르니까 그런 거라고. 사회에서 겪은 다른 일들은 대부분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럼 공부만 잘 한다고 취업이 잘되나? 그것도 아니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중에 1등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공부처럼 하루에 영어단어 100개씩 외우며 꾸준히 노력한다고 그 사람 마음을 얻어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과목보다 수 만 배로 다양한 것이 사람 마음의 모습이다. 1분에도 여러 번씩 바뀌기도 한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을 뜻대로 하겠는가. 그러니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일 거다. 하물며 그런 기적이 일어나 수년간 사랑을 키우며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겠지? 근데 갑자기 쨍그랑. 상대방의 마음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둘만의 소중했던 약속들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인생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다. 실패 투성이다. 절망에 빠진다. 이러니 우리가 ‘허무’와 가까워질 수밖에. 빈속에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멍도 때리고, 갑자기 걷고 싶어지고, 뛰고 싶어지고, 게임만 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응, 알베르 까뮈가 인생은 허무를 분비하는 거라 했잖아.

커피 한 잔의 열량은 5칼로리, 키스 5분의 열량과 같다.
우리가 3년 동안 나눈 키스의 열량은 얼마나 될까?
사랑의 열량은.... 그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그러니 TV속에 비춰진 이단들의 모습에 ‘허무’가 보이지 않았던 게 당연하다. 그들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들이 믿는 진리가 사실이 아닌 ‘그들만의 진실’일지라도. 나도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날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행복하겠지, 그게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들은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선한 이의 말만 따르면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겠지. 정말 보람찬 하루하루라며 잠이 들 것이다. 매일 그 말씀을 공부하고 찬양하고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전에 알던 동생이 다단계에 빠져있었다. 그 아이의 태도가 어느 순간 달라졌다고 느꼈었다. 평소 소박하고 착실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부쩍 하는 거였다. 언니 우리 나중에 꼭 어디 놀러가요, 언니 우리 나중에 꼭 그 영화에서처럼 거기 가서 그거 먹어요, 언니 우리 나중에... 나중에... 그 아이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 나이에 맞지 않는 온갖 화려한 것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들 모두, 그 이름도 찬란한 ‘다이아몬드 등급’들이 보여준 세상이었다. 다 필요 없고 ‘우리를 믿고 따라오면 여러분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단다. 다단계에 빠져있는 분들의 SNS를 종종 들어가 보면, 사이비 이단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더라. 보상만 있고 과정이 쏙 빠져있다. ‘성공하실 거예요!’, ‘성공하자.’라는 말과 함께, 거기서 성공한 사람들의 상징 같은 것들만 쭉 배열되어 있다. 글쎄, 성공의 기준을 벤츠와 부하 직원(?)100명으로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거기서 그렇게 세뇌시킨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제차만 몰면 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나 보다. 그 외제차를 몰며 추앙받는 방법은 거기서 하는 말을 믿고 무조건 따르는 거랬다. 실패의 가능성? 거의 제로‘0’에 가깝다고 한다. 와, 이쪽도 하루하루가 굉장히 보람찰 수밖에. 당연히 허무에 빠질 리 만무하다. 인생에 정답이 저기 있었구나. 그럼 나는 의존적인 술도 안마실테고 건강해지고 돈도 벌고 동화 같이 찬란한 웃음을 지을 텐데.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허무하지 아니한 것들에 빠지는 건 어른이 아니다.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애들의 본분은 ‘놀이’다. 아이들은 놀이로 세상을 접하지만, 어른들은 세상을 다르게 접해야 한다. 한마디로 저 어른들은, 놀고들 있는 거다.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거기 빠뜨린 사람이 아니라 거기 빠진 사람이. 정말 무지無知해서 그런 판단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인생을 너무 쉽게 살려고 한 것 같아 괘씸하다.
영화 <사이비>에 나오는 수몰지역예정 주민들은 보상금만 가져다주면 하나님이 택한 천국 백성 14만 4천명에 들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TV에서 본 이단에서는 그 메시야와 섹스를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단다. 다단계는 거기서 짜준 매뉴얼대로 내 가족 친구를 끌고 오면 된다. 심지어 어떤 곳은 ‘다이아몬드 등급’을 내 아이에게 승계할 수 있는 곳도 있단다. 내 아이는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나오는 거다! 아니, 인생이 이렇게 쉬울 수 있다니?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 괘씸하다는 거다. 장밋빛 인생을 꿈꾸면 가시덤불을 견딜 각오를 해야지. 금방 시들더라도 그 허무함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초연함까지.
나중에 그 성장통을 어찌할 것인가. 진리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때, 회피하고만 싶던 현실을 ‘쿵’ 알게 되었을 때에 마음이 받을 상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걸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단 말이지? 그 하나님? 그 말씀? 그 다이아몬드? 이미 흩어지고 없다. 그게 그가 배울 최초의 큰 허무일지도. 그래, 차라리 그렇게 큰 매를 먼저 맞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구나.

허무를 아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관능적인 인간이 아닐는지. 나는 동화를 읽으며 ‘아, 섹시하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들꽃처럼 산 이들이 더욱 매력적이다. 어릴 땐 흙도 퍼먹고, 개미도 퍼먹고, 나이 먹어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어본 이들 말이다. 이들은 허무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허망함을 분비하는 인생을 실행한다. 채워지지 못한 구석이 보인다. 쓴 소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보면 감싸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관능적이다.

(영화 <타짜>에서 목숨 걸고 갖고 나온 돈이 흩어지는 걸 보고 있는 고니)

어쩌면 모든 게 정말 별거 아닐지 모른다.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개똥같은지 알게 뭐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자. 장담하건대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허무’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그것들은 정말 대단한 것들이라서, 신이 만들 때부터 일부러 정말 간절한 사람만 도전하라며 일부러 ‘허무’를 곳곳에 깔아놓은 것일지도. 사랑도, 꿈도, 비전도 그러하다.
견디고 또 견디자. 허무함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서로의 잔을 채워주면 될 일이다. 오늘도 그 가치 있는 것을 쫓느라 수고했다고. 삶을 삶답게 사는 네가 멋지다고 말이다. 그런 당신이 너무도 관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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