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들은 예술을 하지 않는다. 돌고래가 쇼에서 하는 것은 생계 활동이다. 돌고래가 그 활기찬 몸뚱아리로 멋진 활 모양을 그리며 물 위를 뛰는 것은, 그래야만 물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신문]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나요?’
이 질문은 어느 날 내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올라왔던 글이다. 누군가의 이런 모호한 질문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었다. 그래, 저 질문이 모호한 게 아니다. 내 대답이 모호할 테지. 뭘까? 늘 그렇게 예술 지상주의 어쩌니 말은 하면서 정작 예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지, 난 생각해보았었나. 순간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얼른 머리를 굴려보며 내가 환희를 느꼈던 작품 몇 개를 떠올려 보았다. 역시 그 작품들은 놀라우리만치 인상 깊었으며, 그 잔향이 오래도 퍼지더라. 난 불과 몇 초 만에 그 페이스북 글에 멋지게 리플을 달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것도 한 문장으로! 그러나 꾹 참고 여기에 쓴다. 예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냐고?
예술은 우리에게 차별화된 느낌, 그러니까 우월감을 줍니다.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자. 쉬운 예로 당신이 어디에 가서 ‘재밌게 본’ 영화 말고, 수작秀作 같은 것- 그러니까 좀 예술적인 것을 말해보라면 아마도 남들이 잘 모르는 영화를 언급하며 설명충처럼 떠들어댈 것이다. 그게 바로 상대방보다 내가 더 많이 느끼고 알고 있다는 우월감이다.
예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이다. 동물들은 예술을 하지 않는다. 돌고래가 쇼에서 하는 것은 생계 활동이다. 돌고래가 그 활기찬 몸뚱아리로 멋진 활 모양을 그리며 물 위를 뛰는 것은, 그래야만 물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본능이랄지 그런 건 절대 아닐 거다.
‘오, 난 이제 공연가로서 수명을 다 했어. 오늘이 내 마지막 무대이겠으니 하얗게 불태워야지!’ 이런 건 인간 예술가나 하는 생각이요, 그 똑똑한 돌고래 역시도 동물답게 마지막 물고기 한 마리에 집중한다는 거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가 그 돌고래를 해수라고 부르던, 토미라고 부르던 그 이름이 걔네들 사이에서 뭣이 중헌디? 그런 예술가가 있다는 사실을 돌고래들은 느끼지 못할 뿐인걸.

사실 인간사에서도 예술은 약간 사치의 영역이었다. 특히 산업혁명 이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귀족들이 대부분 향유했다, 그들에겐 시간과 자금적 여유가 있었다. 농도들이 열심히 땅을 일굴 때, 그들은 춤이나 추고 그림을 그리거나 오페라를 보러 다니면 됐었으니까. 몇몇 예술가들은 그들을 위한 것들을 창조하는 데에 열중하기도 했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그러한 희곡들을 꽤 많이 썼었다.
앤디워홀은,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 예술은 오히려 생필품이 아니기에 가성비를 따질 필요가 없고, 소모품이 아니기에 가격이 저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부르는 게 값이고, 그 가치를 높게 판단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엄청난 돈을 지불한다. 왜? 그들은 예술이 주는 우월감의 환희를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우월감이나 차별화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가? 혹시 그렇다면, 당신을 이런 사람과 비유하고 싶다. 예술 작품은 이를테면 마세라티 자동차라고 치자.
당신은 마세라티가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성공하면 꼭 저 차를 타겠노라, SNS에 그 자동차 사진을 올려놓고는 정작 시승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사람인 것이다.
예술과 마세라티? 그 존재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체험하고 느껴야, 비로소 그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사랑받는 궁정음악가였던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그래, 예술은 위대하지! 그러나 예술 그 자체가 송장 같이 굳은 뇌와 심장 앞에서 가치 있을 리 만무하다. 예술을 ‘느껴야’ 탁월해지는 것이다. 작품의 작가 주의적 관점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보이는 숨은 의도나 우연성을 찾는 일,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나만의 취향과 독창적 감상...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말로 표현하지 못할 환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사람들만이 한 군데에서 모여 차를 마실 만하다. 그리고 저희끼리 우월한 감정을 향유하는 것이다, 우린 적어도 이 작품을 느낀 사람들이라고. 밖에선 개뿔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그래, 그러니까 순수한 감정이지! 아무것도 보거나 느낀 것도 없으면서 SNS에 우월한 척해대는 허세충들 보다야 백번 옳은 감정이지 않겠어?
그래서 예술은 ‘돈’ 같다. 돈도 그 자체가 송장 앞에선 가치 있을 리가? 돈도 ‘써야’ 그 가치가 탁월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보며 어떻게 써야할지 벌써 머릿속이 행복해지지 않나. (난 결과가 나오지 않은 로또 복권만 봐도 그러하던데.) 음, 예술은 돈과 같지, 그렇고말고! 또 그렇기에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며, 탁월하게 쓰면 더욱 짜릿하고 우월감의 환희를 느끼게 해준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청동기 시대부터 계급사회가 뼛속깊이 박힌 종자들이다.

감상하는 태도는 자기 식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감상을 잘해내는 사람이 있다.
돈도 써본 사람들이 잘 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듯이.
어떤 순진한 이가 좀 난해하거나 해석이 필요한 예술 작품에 대하여, 운 좋게 잘 감상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저런 건 정말 열 번 중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예술에 정답이 어디 있느냐고? 없지. 창작자 본인도 그게 가끔 헷갈릴 때가 있는데. 작품 자체가 하는 얘기가 많아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정답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술을 향유하면 할수록 그 정답에 대한 감상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진 다는 거다. 그러니 계속 예술을 향유하고 느끼는 인간이 되면 좋다.

예술은 위대하지만 사실 예술가는 별로 위대하지 않다. 그냥 인간이다. 얼마 전 영화 <프리다(Frida)>(2000)를 보았다.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에 대한 전기 같은 영화다.
누구보다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용감했던 그녀의 뜨거운 심장은 어찌하라고, 그 두 다리는 못 쓰게 되어버렸나. 그녀는 그 심장으로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작품을 빚었다.
재능보다 앞선 것은 열정이요, 열정보다 앞선 것은 사랑이다. 예술가를 예술가로서 살게 하는 작품은, 거의 팔 할 이성으로 표현 못 할 사랑에 의해서 탄생해왔다. 그리고 이런 사랑들은 대부분 화무십일홍 같은 아름다움 이거나, 혹은 자기 파괴적 사랑이다. 똘스토이 식대로 표현하자면, ‘성장이 배제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열정이 작품으로 표출되는 게 아닐는지.
‘돌이켜보자면 22년의 결혼 생활은 끔찍했어. 그러나 다시 돌아와 줘. 난 나 자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런 불나방같은 프리다의 사랑은 ‘성장이 배제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혼자선 할 수 있는 게 별거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허나 그녀의 사랑이 빚은 예술 작품들은, 그녀의 예술 같은 삶은 아직도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들을 선사하지 않나. 아, 물론 이것을 느낀 자만이 알겠지만.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 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 멕시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집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이나 미술, 시 낭송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이 얼마나 우월한 느낌인지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쥐뿔 돈이 없는 예술가라도, 쥐뿔 돈이 없는 장사꾼보다야 좋은 대접을 받는 것도 다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 인간은 하찮을 지라도- 심지어 성격은 더욱 거지같은 지라도, 저 이의 영혼은 뭘 만들어낼지 모른다는 걸!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겠는가? 멋진 음악으로 공간을 채울 수도, 짜릿한 문장들로 뇌의 전율을 느낄 수도, 그리고 모든 게 가능한 영화로 하루 종일 그 분위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감상하고 영감 받고 느끼는 삶은, 마치 어느 훌륭한 곳에서 멋진 누군가와 하루 종일 눈을 마주치며 향긋한 술을 하루 종일 마시고도 계속 적당히 취하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저 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일. 그러나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 기분.
그게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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