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얼마 전 청소년 성소수자를 돕는 취지의 모금이 있어 거기에 참여했었다. 그들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냥 평소 기부 사이트에 얼씬거리다가 기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몰랐던 누군가의 불편을 알게 되었고, 또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 얼마 전, 대만이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애 결혼을 완전히 인정했다. 당일에만 500쌍 넘는 커플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나 역시 성소수자들을 인정하는 쪽이다. 나의 종교 신념은 기독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반박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내가 인정을 하고 안하고 할 게 뭐가 있나?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것이다. 

영화<가장 따뜻한 색 블루> 중에서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중학교 1학년 때쯤 ‘동성애’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같은 반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던 가수의 팬픽을 읽고 있었는데, 그게 ‘야오이소설’이랬다. 나는 그게 연예인들을 두고 쓴, 정말 말 그대로 팬들이 지어낸- 그러니까 연예인이 나와서 그렇게 부르는 소설인 줄 알았다. 

당시 ‘신화’의 팬이던 나는, 친구에게 ‘그럼 신화도 야오이 소설 있어?’ 물었고 그 아이는 신화 팬들이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를 알려줬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알았다. 대부분의 그 소설들을 좀 읽다 말고 새로운 걸 읽었는데(솔직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다 읽을 정도로 재밌는 게 없었다),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더라는 것. 

한 멤버(동료 여자 가수 사이에서 인기 제일 많음)가 유난히 틱틱거리는 다른 멤버(보통 제일 소심하거나 말이 없는 캐릭터)와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이 다른 멤버가 달라보이기 시작하고... 그를 챙기다가, 결국 이 인기 많던 멤버는 이 소심한 멤버에게 빠진다는 내용. 인기 많은 멤버의 다른 여자들은 다 버림받구... 뭐 그런 거였다. 중요한 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떤 계기로 깨달아버리는 장면이, 그리고 여자를 차는 장면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 즉 ‘야오이소설’이 boy love소설의 일본 말임을 알았고, 그 때 처음 동성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는 여자 중학교를 다녔었는데, 당시 우리 반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애들은 대놓고 놀리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와- 같이 다니는 조금 체구 작은 친구를 두고 항상 숙덕거렸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도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고, 조를 짜거나 할 때에 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숙덕거림의 대상이니까, 나도 겁이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부끄, 아니 쪽팔린다.

그 친구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레즈비언 커플이 맞았던 것 같다. 그냥 둘이 말이 없고, 둘만 놀고, 둘이서만 밥 먹고, 그러나 뭔가 우리랑은 섞이지 못하는- 우리 교실에서 걔네만 뭔가 붕 떠있는- 혹은 둘만 축 가라 앉아서는 시끌벅적한 여중생 교실에서 걔네만 저 지하에서 뭔가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축축한 눈빛... 나는 그게 그냥 그 친구들의 성격일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에와 생각해보면 레즈 커플이 맞았던 것 같다.

그럴 일 전혀 없겠지만 다시 돌아간 데도 뭐 갑자기 잘해주거나 이런 건 전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냥 그 시간에 살고 있는 내가 있다면, 그 친구들도 뭐 특이한 거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청소년기는 자아정체성 형성은 물론, 학교나 혹은 진짜 사회를 통해 ‘사회’를 배워나가는 시기다.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른들의 관심이나 말 한마디에 민감하다.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하는 것이 가능한 나이다. 그런데 이때 사회로부터 소외나 부정적인 시선을 받게 된다면? 그리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심할 경우 이들은 더 이상 삶을 견디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영화<콜미 바이 유어 네임>중에서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는 문제들은 거기에 매우 크게 노출되어 있다. 사춘기 시절 가장 관심있는 거야, 두말 하면 잔소리 아닌가. 그들의 몸이 그런 최대 변혁의 시기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사랑을 과연 감출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이 나이 먹은 나도, 사랑을 감추기가 어려운데 그들로서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사랑할 수 있다는 그 마음 자체에- 고통이 따르지 않길 바란다. 청소년 시기, 아니 20대,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사랑은 다 고통스러울 수 있다. 모든 사랑이 운명처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는 게 훨씬 많다. 응,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있어-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자체 때문에 힘겹진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는 기준과 판단이 명확해야 하고, 잘못된 정보전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유튜브에서 ‘동성애’가 병적인 것이라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영상을 보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싫어요’만 누르고 댓글 달 생각도 안했다. 아직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것도 의사가! 정말 놀라웠다(...)

199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동성애를 국제질병분류(ICD)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2016년, 정신의학협회는 ‘성별 정체성 및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 끌림, 행동에 대한 세계정신의학협회 성명서’를 통해 전환치료- 즉 동성애 치유를 금지시켰다. ‘동성애’가 치유 가능하다? 이런 말은 애초부터 쓰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병에 걸린 적이 없는데 무슨 치유를 한다는 것인가? 이건 매우 폭력적인 발언이자 행위다.

청소년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2-30대의 성소수자들이 가장 겁을 내는 상대는 바로 부모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이, 내 생각에도 가장 어려울 것 같다. 이건 해외의 경우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는 더욱 심할 거라 생각한다. 자식이 뭔가 남들과 다르거나 잘못을 하면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길래’라는 말을 하지 않나. 물론 잘해도 ‘뉘집 자식인지 어쩜 그리-’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근데 이젠 더 이상 부모의 교육만으로 자라나는 세상이 아니잖아. 얼마나 매체가 많은데! 그러니 부모님, 당신 탓이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자녀는 아픈 게 아니라구요.

영화<콜미 바이 유어 네임>중에서

내가 기부한 금액은 이와 관련된 상담 업무를 더 확대하고, 이런 이야기를 알리는 홍보사업에 쓰일 거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로미오와 줄리엣들- 만 있는 게 아니다. 로미오와 로미오들- 줄리엣과 줄리엣들-도 있다. 
사랑할 수 있는 용기에 박수를, 기회에 부러움을, 시간에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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