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바로 젊은 계층이다. 
(톨스토이 <악마> 중에서)

[공감신문]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예전엔 어디를 가든 막내였는데 요즘은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에 있어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나는 평생 글을 쓰길 원하고 흔한 말로 ‘소통’하길 원한다. 나이, 정치성향, 성적 취향, 국적을 떠나 누구의 이야기든 편견 없이 듣고자한다. 사람은 각자마다 특유의 향기(혹은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간혹 어린 친구들 중 요상하고 희한한 냄새를 풍기는 친구들이 있더라. 그것이 난 그들의 개성인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꽤나 보편적이더라. 그것이 어떤 성질일지 궁금해 하다가- 결국 어떤 재료들의 조합인지 감히 알 것도 같다. 내 감상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별로야.

사진출처=영화 유스 스틸 컷

나는 악취보다 무취가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향이더라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누구는 고수 냄새가 싫다지만 난 고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근데 그것이 어떤 향신료나 식재료 따위의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울 순 있지 않나. 내가 보아온 몇몇 친구들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딱 보아도 ‘무취’인 친구들은 무취인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혹은 향기를 내고 싶은데 그것을 일찌감치 포기하여) 일부러 ‘악취’를 풍기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본인에게 첨가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의 그런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우린 평생에 걸쳐 자신에게 뭐가 맞는 지 알아가야 하니까. 근데 중요한 건, 그런 그들이, 자신의 두 콧구멍을 움켜쥐고는 사람들의 냄새를 경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들을 ‘젊은 꼰대’라 칭하고 싶다.

흔히 ‘꼰대’를 자신만의 가치관이 굳어져서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주로 나이든 기성세대들에게 이런 표현을 종종 쓴다만, 젊은 세대들 중에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더라. 이들이야말로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에 ‘꼰대’, ‘꼰대 같은 소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얼마나 책임감 없는 표현인가! 이러쿵저러쿵해서 너의 의견은 별로야,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넌 꼰대야!’라고 해버리는 거다. 이것은 ‘오빤 못생겨서 싫어요’보다 책임감 없고 혼자만 편리한 소리다.

이렇게 편리하고 배타적인 감정은 남 탓, 사회 탓을 습관적으로 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다지도 탓하기 좋은 ‘헬조선’을 만든 것이 기성세대라고 인정하는 분위기다보니 세대 간의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다. 남녀평등에 이어 역차별 이야기가 나오듯- ‘때론 너무 간 거 아냐?’라고 생각될 때도 솔직히 많다. 요즘 이런 친구들을 종종 보다보니 이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소설 구절이 떠올랐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노년층이 매우 보수적이고 반대로 젊은 사람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주의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결코 공정하거나 옳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바로 젊은 계층이다. 젊은 사람들은 열심히 살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늘 보아 왔던 삶의 방식을 자기 삶의 전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 소설 <악마>중에서)

실제로 그러하지 않나. 요즘은 심지어 주변에서 보아오는 방식이 아닌, SNS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이른바 ‘시녀’들은 인스타그래머의 사진에 ‘존경 한다’고 댓글을 단다. 그녀의 피드 속 그 삶을 믿어? 그러면서 삶을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글쎄다.

사진출처 = 영화 '벨벳 골드마인' 中

요즘 ‘YOLO’라는 말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쓴다. ‘YOU ONLY LIVE ONCE.’ 한번 사는 인생이니 즐기며 살자는 의미라지? 그래서 누가 꽤나 멋져 보이는 여행을 가거나 그런 물건을 사면 ‘욜로족이네’라고 말하거나, SNS에 본인 사진을 올리며 #욜로족 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현재를 즐기겠다는 것인데… 아니, 미안한데 넌 욜로족이 아니라 젊은 꼰대같아 보이세요.

사실 이 단어는 나온 지 몇 년 된 좀 철 지난 단어다. 뮤지션 드레이크(Drake)가 2011년 발표한 곡에서 써서 유행이 된 말인데, 우리나라에선 6년이 지난 지금에야 ‘욜로욜로’ 거리는 거다. 난 거의 저 단어를 싸이월드 시절에 썼던 거 같은데... 흠.

사실 이 단어가 원래 상징하는 것은 내일이 없는 듯, 하루살이, 한달살이처럼 살라는 게 아니었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나답게!’ 후회 없이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자는 메시지가 더 강했다. 상당히 고전적인,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 ‘나답게 해주는 사람과 연애해라.’ ‘연극은 끝나기 마련이에요’와 비슷한 맥락인데 그걸 좀 스웩(swag)있게 표현한 거지. 그런데 이게 마치 ‘NO DAY BUT TODAY!’(단지 오늘 뿐!)와 같은 소비개념으로 쓰인다니 정말 안타깝다. 그래요, 원래 다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마련이지요.

우린 감정적일 때 이성적이지 못하다. 연인 사이에도 하도 싸우다보면 나중엔 ‘우리가 뭐 때문에 싸우지?’ 원인도 무색해진다. 그냥 너만 보면 화가 나서 서로 으르렁댄다.

젊은 세대들은 화가 나있다. 나도 젊은 세대이니 좀 화가 난 편이다. 내 글만 보아도(사랑 얘기할 때와 달리) 좀 격양된 게 느껴지지 않나. 이런 글을 쓴다고 기성세대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 회사를 다니거나 자격증 시험 같은 걸 보려는 분들이 있다면, 당신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욱 안정적이실 거다. 나야말로 내일을 모르는 비정규직 글쟁이에 불과한 걸?

요즘은 세대 간에 마치, 권태기의 남녀처럼 서로 화가 나서 밀치고 싸우고 고깝게 이야길 듣는다. 그게 젊은 세대, 아니 젊은 꼰대들이 훨-씬 심하다. 젊은 꼰대들의 분노의 표현 중 하나가 약간의 ‘관종 짓’이다. 모든 관심종자가 그런 게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풍기는 악취는 분노다.

무취인 사람은 무취 자체가 개성이다. 난 그런 사람들을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르겠다, 내가 개성 강한 인간이라 그런 지 오히려 그런 이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 ‘분명 저 이도 저 만의 냄새가 있을 거야!’라며 자꾸만 코를 묻고 킁킁대고 싶어진단 말이지. 근데 튀지 못해서, 아니 그냥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오물을 끼얹는 것만 같다. 그리고는 그것을 시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냄새 가진 이들을 곁눈질로 째려보고는 외면하며 비판한다. 정말 꼰대스럽다.

사실 꼰대스럽게 사는 게 편하면 그렇게 살아도 되지, 뭐. 나도 어떤 쪽에 있어서는 엄청난 꼰대니까. 근데 나이가 어릴 때 꼰대가 되면 솔직히 자기 손해다.

나이가 든 사람이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지금의 기성세대들이야말로 정말 ‘안 꼰대’처럼 자라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집안의 모든 어르신들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했었다. 그 뿐인가? 동네 어르신, 옆집 아저씨, 건넛집 아줌마나 친구, 누구와도 소통하며 자라온 세대들이다. 우리 세대야말로 한 쪽 말만 듣고, 한 쪽 귀는 막아도 된다 믿고 컸다. 기성세대가 어느 특정한 데에 있어 고집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러는 편이 자기들 삶에 안전한 편이라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왜? 그들은 비교적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젊은 세대들은 잃을 것이 적다. 책임감도? 적은 편이다. 책임감이 적다는 것은 권위가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신나는 특권이다! 잃을 것이 적다는 건 더 많은 걸 누려보고 배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내가 아는 게 전부’라 믿으며 협소한 틀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는가! 그게 너무 안타깝고, 솔직히 말하자면 바보 같아 보인다.

나는 이른바 ‘철없는’ 어른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철이 없어서 누구보다 사랑에 잘 빠지고, 창의적이며 항상 열려있다. 호기심이 많고 ‘인정’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엄청 심각한 말도 안 통하는 수준의 꼰대이거나, 혹은 반대로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철이 없다. 그들은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 철없는 어른들과 함께 있자면,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지 아니하고 펄떡 펄떡 물 위로 뛰어오르고 싶어진다. 그들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러해진다. 왜? 그들이 하는 말들은 실체가 될 수 있으니까.

그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앨범을 내 보았고, 전시회를 해보았고, 영화를 찍어 상영관에 걸어보았고, 책을 내보았다. 심지어는 그 단 하나의 작품으로 외제차를 몰고 건물을 세웠으니 거칠 것이 있겠나. 테이블 위에선 시스템이 파악된 이야기만 오고간다. 왜? 본인 자체가 시스템이니까.

그들 역시 희한한 향기를 풍기지만 그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그런 희한함은 꾸미려 해도 꾸며지지 않는 성질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마치 소설<향수>에서 장밥티스트그루누이가 만드는 대단하고 잔혹한- 날 것 같은 향의 기분이랄까!

사진출처=영화 향수 스틸컷

개성이 강한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목을 받는다는 건, 그에 따른 피로함과 비판에 대한 상처를 견뎌내는 것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밖에 없을 자신의 젊은 날을 잃지 않길 바란다. 그래, 욜로족이 유행이니 정말로 욜로족이 되길 바란다. 한번 뿐인 인생을 자신답게 살기를. 남들에게 나 ‘특이하다’고 보여주기 위해서 말고. 분노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키는 건 정말 머저리 같은 낭비지.

정말 나에게 뭐가 어울리는지를 찾아가시길. 단언컨대 그런 소소한 것을 찾다보면 없는 향도 은은히 생겨나지 않을까? 그래, 당신이 어떤 모양 팬티를 입었을 때 엉덩이가 가장 이뻐 보이는지 알고 있어? 으휴, 그런 것도 모르면서 욜로족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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